예전에는 예배가 끝이 나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서 남아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았었다.
얼마나 간절한지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모습이 거룩하게 보일 정도 였다.
그러나 요즈음은 예배가 끝이 남과 동시에 썰물처럼 예배당안은 텅텅비고 적막감 마져 든다.
하나님을 향한 애끓는 간절함과 눈물이 상실된 시대가 되었다.
우리 선조들은 대표기도도 마음에서 나오는 간절함이 지나쳐 너무 길게 기도를 하는 바람에
목사님이 종을 쳐서 기도를 중단했다는 우스운 일화도 있다.
그러나 언제 부터인지 대표기도를 종이에 써서 하는 풍토가 만연이 되어 하나님께 성명서 낭독 하듯이
기도를 하게 되었다.
내용은 너무나 잘 정돈 되어서 문학가를 방불 할 정도가 되었고 보기에도 아름다워 졌다.
그러다 보니 그들에게 다른 모임에서 갑자기 기도를 부탁하면 당황 하거나 기도를 제대로 못하는 결과가 종종 나타난다.
기도의 훈련이 부족한 탓에 기도의 자립화 같은 것이 점점 쇠약해지는 형국이다.
글을 써서 기도 하는 것도 장점이 많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적으로 옳다고는 볼수가 없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인데 대화를 써서 한다는것이 조금은 어색하다.
카토릭 같은데서는 성경은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기도서를 가지고 다니면서 염불 하듯이 같은 내용을 반복적으로
하는 것을 볼수가 있다.
특히나 장례식 때에 보면 연도라는 이름으로 불교의 승려들의 염불 모습과 흡사하다.
기도는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하나님께 아뢰는 상호 소통의 수단이다.
기도는 훈련이다.
기도는 하면 된다.
대화에는 제약이 없다.
한나처럼 심정을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토로하는 것이다.
써서 하는 기도가 그 동안 기도를 너무나 형식화와 기도의 경직화를 가져 왔다.
그렇다고 해서 써서 하는 기도를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조상들은 대표기도 할 때에 써서 기도를 하는 것을 부끄러워 하는 시절이 있었다.
써서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은 기도가 훈련이 되지 못한 것이요, 기도를 그 만큼 안하고 있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성도는 누구와 어디에서 기도 하더라도 당당하게 그에 맞게 기도하는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한다.
기도는 우리 신앙인 들에게 무기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늘 훈련 되어 있어야 환란 중에도
승리하는 성도로 살아 갈 수 있다.
기도가 훈련 되어 지지 않으면 성도의 신앙 생활은 곧 힘을 잃게 마련이다.
대표기도 할 때에 중언 부언 하지 않기 위해서 써서 할려는 걱정 보다는 기도의 훈련을 통하여
온전한 기도를 할 수 있도록 기도의 달인처럼 늘 기도에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한다.
대화를 못하는 자를 벙어리라 하듯이 기도를 못하는 사람도 영적인 벙어리와 같기 때문이다
기도는 하는것이지 읽는 것이 아니다.
집에서 혼자 기도 할 때 써서 기도하는 자를 보았는가?
대화는 써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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