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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채신은 절강성 출신인데, 성격이 시원스럽고 품행이 단정하며 자중하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 한다는 말이, "내 한평생 아내 말고 다른 여자는 없다." 라는 것이었다. 한번은 그가 일이 있어 금화에 갔다가 성의 북쪽에 있는 어떤 절에 여장을 풀었다. 절안의 전각과 탑들은 매우 크고 화려했지만, 쑥대가 사람의 키보다 높게 자라난 풍경으로 보아 오랫동안 인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동서로 가로놓인 승방에도 쌍빗장이 시늉으로만 걸려있을 뿐이었다.다만 남쪽에 있는 작은 건물은 최근에 빗장이 질린 것 같았다. 다시 불전의 동쪽 모퉁이를 살펴보니 아귀에 꽉 찰 듯한 굵은 대나무가 자라고 있고, 계단아래의 커다란 연못에는 야생 토란이 꽃을 피우는 참이었다. 영채신은 이곳의 고요하고 그윽한 정경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마침 *학사안림(學使案臨) 때문에 금화성 안은 방값이 급등했으므로 그는 이 절에서 묵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리하여 그는 절 주변을 천천히 돌아보면서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날이 저물자 어떤 서생이 나타나 남문의 빗장을 열었다. 영채신은 황급히 달려가 그에게 인사를 하면서 이곳에 머무르고 싶다는 자신의 의사를 전했다. "이곳은 주인 없는 절입니다. 저 역시 여행하던 중 임시로 머물고 있는 처지니까요. 이렇게 황량하고 썰렁한 절집이라도 계시겠다면 저 또한 가까이 뵈면서 가르침을 청할 수 있을 테니, 제게도 잘된일이지요." 영채신은 서생의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면서 짚을 깔아 침대로 삼고 판자를 엮어 책상을 만들면서 이곳에서 장기간 머무를 작정을 했다. 그날 밤은 달이 무척 밝았다. 맑은 달빛이 물처럼 흐르는 가운데 두 사람은 불전의 낭하에 무릎을 마주하고 앉아 통성명을 했다. 서생은 자기를 일러, "연씨(燕氏) 성에 자는 적하(赤霞)." 라고 소개했다. 영채신은 그가 시험을 치러 온 수재가 아닌가 추측했지만 말투를 들어보니 절강 사람의 말씨와는 전혀 달랐다.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저는 섬서 사람입니다." 하는 대답이었다. 서생의 말투는 더없이 소박하고 성실했다. 이윽고 두사람 모두 더 이상 할말이 없게 되자 서로 인사한 다음 각자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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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채신은 잠자리가 낯설어 오래도록 뒤척이면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처소의 북쪽으로부터 마치 인가라도 있는것처럼 희미하게 웅얼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몸을 일으켜 북쪽으로 난 석창아래로 간 다음 살그머니 바깥을 넘겨다보았다. 그러자 나지막한 담장 너머로 작은 집 한 채가 보이면서 마흔 살이 좀 넘은 듯한 부인네 한 사람도 눈에 들어왔다. 또 색깔이 바랜 붉은 옷을 입고 커다란 은비녀를 꽂은 할미도 한 사람 있었는데, 그녀는 구부정하게 허리를 굽힌 채 달빛 아래에서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소천이가 왜 이렇게 오래 나타나지 않을 까요?" 부인의 푸념에 할미가 응수했다. "오 때가 거진 되었어." "할머님께 무슨 원망하는 말이나 하지 않았어요?" "그런 소리는 못 들었어. 그러나 기분은 별로 좋아 보이지 않더 구나." "이 계집애에게 너무 끌려가면 안되겠어요."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열일고여덟 살가량의 아가씨가 한 명 걸어 왔는데 세상에 둘도 없는 절세미인이었다. 할미가 웃으면서 말했다. "본인이 없는 데서 그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라더니, 우리 두 사람이 마침 너에 관해 얘기하던 참인데, 우리 귀여운 애기씨가 소리도 없이 살그머니 왔구먼. 다행이 네 욕을 안했으니 망정이지." 이어서 할미는 또 이렇게 여자를 추켜세웠다. "애기씨는 정말 그림같은 미인이야. 만약 내가 남자래도 너 때문에 혼이 나갔을걸." 그 말에 여자가 볼멘소리로 대꾸했다. "할머님, 그만 추켜올리세요. 누가 저 같은 사람 좋다고나 한데요?" 부인과 여자가 또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들리지는 않았다. 영채신은 그들이 이웃집 사람들인 줄 알고 잠자리에 들면서 더 이상 엿듣는 일을 그만 두었다. 다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사방은 조용해지고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가 마침 막 잠이 들려는 순간 누군가 방안에 들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황급히 일어나 자세히 살펴보니, 바로 북쪽 집에 있었던 그 여자였다. 영채신이 당황하면서 무슨 짓이냐고 묻자, 여자가 웃으며 응수했다. "달빛이 너무 좋아서 잠을 이루지 못하겠어요. 당신과 함께 사랑을 나누고 싶네요." 그 말에 영채신은 정색을 하면서 꾸짖었다. "남들의 입길에 오르고 싶소? 나 또한 다른 이의 한가한 말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오. 자칫 한번 실수로 염치와 도리를 모두 잃어버리고 싶은 거요?" "한밤중인데 누가 알겠어요?" 그러나 영채신은 다시 그녀를 꾸짖었다. 여자는 어쩔 줄을 모르면서도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하였다. 영채신이 소리를 지르며, "어서가시오. 그러지 않으면 고함을 질러 남쪽 방의 선비를 깨우겠소." 라고 위협하자, 여자는 겁에 질려 그제야 물러갔다. 하지만 방문 밖으로 나갔다가 금방 되돌아오더니 황금 한 덩어리를 이불 위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영채신은 금덩이를 주워 정원 층계로 내던지며 말했다. "의롭지 않은 재물로 내 호주머니를 더럽히려 들다니!" 여자는 부끄러워하면서 밖으로 나가더니 황금을 주워들고 혼잣말을 했다. "이 남자 심장은 쇠나 돌로 만들어졌나 봐."
이튿날 아침, 시험에 참가하려던 난계현 출신의 서생이 하인 한 명을 데리고 와 동쪽의 승방에 묵었다가 한밤중에 갑자기 죽어버렸다. 죽은 사람은 발바닥 한 가운데에 송곳으로 찌른 듯한 작은 구멍이 나 있었는데, 거기서 피가 가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모두들 그가 왜 죽었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 날 밤이 지나자 하인도 죽었는데, 증상이 그 주인과 똑같았다. 어둑해질 무렵 연생이 돌아왔기에 영채신이 그 일에 대해 물었더니, 그는 귀신에 홀렸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영채신은 평소 성격이 굳세고 올곧았기 때문에 연생의 말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한밤중이 되자 여자가 다시 영채신을 찾아와 말했다. "저는 여러 사람을 겪어보았으나 당신만큼 심지가 굳은 이는 본적이 없습니다. 당신은 정말 성현처럼 인품이 훌륭하시기 때문에 제가 감히 속이거나 유혹할 수가 없군요. 저의 이름은 소천이고 성은 섭씨입니다. 열여덟 살로 요절하는 바람에 이 절 근처에 매장되었는데, 요물의 협박 때문에 이런 더러운 일을 하게 되었지요. 낯가죽을 두껍게 하고 사람을 유인하지만, 이는 실로 제가 원해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이제는 절 안에 죽일 만한 사람이 없으므로 야차가 와서 당신을 죽일 것입니다." 영채신이 그 말에 매우 놀라면서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달라고 부탁하자, 여자가 말했다. "연생과 한 방을 쓰면 재앙을 면할 수 있을 겁니다." "어째서 연생은 유혹하지 않는거요?" "그는 보통사람이 아니라서 감히 접근할 수 없답니다." "어떤 방법으로 사람을 홀리시오?" "저를 희롱하고 관계를 갖는 사람에게는 제가 몰래 송곳으로 발바닥을 찌릅니다. 그의 정신이 혼미해져 인사불성이 되면 그 틈에 피를 뽑아 요괴들에게 먹도록 하지요. 때론 황금으로도 유혹하는데 사실은 금덩이가 아니고 나찰(羅刹) 귀신의 뼈다귀여서 누구든지 그걸 갖게 되면 뼈다귀가 그 사람의 심장과 간을 도려낸답니다. 이 두가지는 목표로 삼은 사람의 기호에 따라 그때그때 적당한 것으로 골라 사용하지요." 영채신은 뜻밖의 호의에 고마워하며 야차가 찾아올 때를 물었더니, 내일 밤이라는 대답이었다. 떠날 때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저는 죄악의 나락에 떨어진 이래 줄곧 구원받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당신의 의협심은 하늘을 찌르니 저를 살 길로 이끌어 고해에서 구해 주실 수 있을 거예요. 만약 당신이 저의 뼈를 거둬다 조용한 곳에 묻어주신다면, 그 은혜는 제게 새 생명을 주시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영채신은 흔쾌히 허락하고 여자가 묻힌 곳을 물었다. "무덤 곁에 백양나무가 있는데, 그 위에 까마귀가 둥지를 틀고 있다는 것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그녀는 문밖으로 나가더니 눈 깜짝할 사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다음날 영채신은 연생이 다른 곳으로 나갈까 봐 새벽부터 쫓아가서 식사에 초대했다. 아침나절부터 술과 음식을 대접하고 조심스럽게 연생의 기색을 살펴가며 하룻밤 같이 지내주길 부탁했지만, 그는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을 구실로 거절했다. 영채신은 그 말을 못들은 체하면서 억지로 자기의 침구를 날라 그의 방으로 옮겼다. 연생은 하는 수 없이 잠자리를 옮겨주면서 그에게 당부했다. "저는 당신이 대장부임을 알고 그 인품을 매우 흠모해 왔습니다. 저에게 작은 걱정거리가 있는데 갑자기 말씀드리기는 어렵군요. 다만 보자기로 싼 상자를 몰래 열지만 마십시오. 만약 제 말을 듣지 않으면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좋지 않을 것입니다." 영채신은 공손하게 그 말을 받아들였다. 이윽고 두 사람은 각자 잠자리에 들었고, 연생은 상자를 창틀 위에 올려두었다. 얼마 후 연생이 코 고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려왔다. 하지만 영채신은 잠이 오지 않아 이리저리 뒤척일 따름이었다. 일경(一更) 남짓 되었을 즈음, 창문 밖으로 희미하게 사람의 그림자가 비쳤다. 잠시 후 그 시커먼 그림자는 창문 쪼 으로 다가와 방안을 기웃거렸는데 그의 두 눈에서는 불꽃이 이글거렸다. 영채신이 공포에 떨면서 연생을 깨우려는 순간, 갑자기 어떤 물건이 흰 비단처럼 빛을 사방으로 뿌리면서 상자를 뚫고 날아갔다. 빛살은 창문의 돌 창살을 베어버리고 맹렬하게 앞으로 뻗어나갔다가 곧바로 되돌아와 상자 속으로 번갯불처럼 들어가 버렸다. 연생이 잠에서 깨어나 몸을 일으켰지만, 영채신은 짐짓 잠든 척 가장하고 몰래 그를 지켜 보았다. 상자를 받들고 점검하던 연생은 안에서 어떤 물건을 꺼내 달빛에 비추며 냄새도 맡아보고 이리저리 둘러보기도 하였다. 물건에서는 해맑은 흰 빛이 형형히 뻗쳐 나왔는데, 길이는 두 치쯤 되고 지름이 부추 잎사귀만 하였다. 이윽고 연생은 그것을 몇 겹으로 단단히 싸더니 원래대로 부서진 상자 안에 집어넣었다. 그러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된 늙은 요물이기에 이다지도 대담할까? 여기까지 침입하여 내 상자를 다 부숴뜨리다니." 그는 다시 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다. 영채신은 너무나 놀랍고 신기하여 몸을 일으킨 뒤 연생에게 무슨 일인지를 물었다. 아울러 그 광경을 모두 보았다고 고백하니, 연생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은 이미 친구가 되었으니 무엇을 더 숨기겠습니까? 나는 검객입니다. 방금도 창문의 돌 창살만 아니었다면 요물은 반드시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겁니다. 비록 죽이지는 못했지만 상처는 입혔어요." "상자 안에 든 것은 뭣입니까?" "칼입니다. 방금 전 냄새를 맡아보니 요기(妖氣)가 묻어나더군요." 영채신이 한번 보고 싶다고 했더니 그는 흔쾌히 물건을 꺼냈는데, 운래는 날이 새파랗게 선 조그만 칼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영채신은 연생을 더욱 미더워하게 되었다.
다음날 창문 바깥쪽을 살펴보니, 땅에는 핏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영채신이 절의북쪽으로 나가자 보이는 것이라곤 총총히 겹쳐 있는 황량한 무덤들뿐이었다. 그곳에는 과연 꼭대기에 새들이 둥지를 튼 백양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영채신은 볼일을 다 마치자 행장을 꾸리며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서둘렀다. 연생은 술상을 차려 영채신을 대접하면서 그와의 이별을 아쉬워했고, 또 찢어진 가죽 주머니를 선물로 주며 말했다. "이것은 칼을 담았던 자루입니다. 잘 보관하면 악귀나 귀신을 물리칠 수 있지요." 영채신이 그에게 검술을 배우고 싶다고 했더니, 연생은 이런말로 도리질쳤다. "당신처럼 신의가 있고 강직한 사람은 검술을 배우셔도 되지요. 그러나 당신은 부귀영화를 누릴 분이지 우리와 같은 일에 종사할 부류는 아닙니다." 이리하여 영채신은 누이동생을 이 땅에 매장했다고 둘러대고 무덤에서 여자의 유골을 파내 옷과 보자기로 잘 싸서 묶은 다음 배를 빌려 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영채신의 서재는 들판을 마주 보고 있었다. 그는 서재 밖의 들판에 봉분을 만들어 섭소천의 유골을 장사 지낸 뒤 제사를 지내며 축원했다. "그대의 외로운 처지가 가여워 내 협소한 거처 부근에 장사 지냈소. 노랫소리나 울음소리가 서로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라오. 바라건대 다시는 흉악한 귀신에게 능욕 당하지 마시오. 한 잔 박주만 올릴 뿐 맛있는 음식은 차리지 못했지만, 이를 탓하지는 말길 바라오." 그는 기도를 마치고 몸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그때 갑자기 뒤편에서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잠깐만요. 저랑 같이 가요!" 돌아보니 소천이었다. 그녀는 기쁨에 겨워 감사의 마음을 나타내며 말했다. "당신의 신의는 제가 당신을 위해 열 번을 죽어도 그 은혜를 다 갚지 못할 것입니다. 청컨대 당신과 함께 돌아가는 것을 허락해 주세요. 부모님을 뵙고 나서 당신의 첩이 될 수만 있다면 아무런 여한이 없겠어요." 영채신은 그녀를 자세히 훑어보았다. 흰 살결에는 발그레한 홍조가 노을처럼 빛나고 있었고, 발은 흡사 죽순처럼 뾰족하고 가늘었다. 환한 대낮에 보니까 더욱 아름다운 미인이었으므로 영채신은 그녀를 데리고 일단 서재로 돌아왔다. 그는 소천에게 잠시 앉아서 기다려달라 당부하고는 우선 안으로 들어가 어머니에게 이야기를 전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말에 대경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당시 영채신의 처는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있는 중이었으므로 어머니는 이 일을 처에게 이야기하여 그녀를 놀라게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소천은 벌써 사뿐히 방안에 들어와 날아갈 듯 절을 올리고 있었다. 영채신이 말했다. "이 사람이 소천입니다." 어머니는 놀라 허둥지둥하며 어찌해야 좋을지를 모르는데, 소천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홀몸으로 떠도는 처지로서 부모형제와도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요행히 영 공자의 보살핌을 받아 그 은혜가 제 온몸에 미쳤습니다. 원컨대 그분의 시중을 들면서 하늘같은 은혜에 보답하고 싶습니다." 어머니는 그녀의 부드럽고 사랑스런 모습을 보더니 비로소 말문을 뗐다. "아가씨가 그토록 내 아들을 생각해 주니 나야 기쁘기 그지없구려. 하지만 내 한평생 아들이라곤 다만 이 애 하나뿐인데, 대를 이어야 할 아이에게 귀신과 결혼하라고 할 수는 없소." 그러자 소천이 얼른 말을 받았다. "저는 정말로 딴 마음은 없어요. 제가 저승 사람이라 어머님께서 믿지 못하시겠다면 오라버니로 섬기는 것은 어떠할지요? 어머님 곁에서 아침저녁으로 시중을 드는 것이야 괜찮지 않겠습니까?" 어머니는 그녀의 정성스런 마음을 동정하여 그러라고 허락했다. 소천은 즉시 영채신의 처에게 인사하러 가려고 했지만, 어머니가 병자를 성가시게 하지 말라고 만류하자 단념하고 말았다. 소천은 곧바로 부엌으로 들어가 어머니를 대신해 요리를 하고 마치 오래 전부터 그 집에 살아왔던 사람처럼 안팎을 들락날락했다. 그러는 사이 날이 저물었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그녀를 무서워하여 무덤으로 돌아가 자라고 권고하면서 침대와 이부자리를 마련해 주지 않았다. 소천은 어머니의 속내를 알아차리자 곧바로 물러 나왔다. 영채신의 서재를 지날 때 그녀는 방안으로 들어가려다가 다시 물러서곤 하며 뭔가 무서운 일이나 있는 것처럼 문밖에서만 뱅뱅 맴을 돌았다. 영채신이 소천을 보고 들어오라고 불렀더니 그녀는, "방안에 서린 칼의 기운이 사람을 섬뜩하게 만드는군요. 지난번 여행중에 모습을 드러내어 당신을 보지 못한 것도 사실은 이 때문입니다." 하고 말했다. 영채신은 그것이 가죽주머니 때문임을 알고 떼어서 다른 방으로 옮겨 걸었다. 소천은 그제야 방안으로 들어와 등잔불 앞에 앉더니 한동안 아무 말도 않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밤에 글을 읽으십니까? 저는 어렸을 때 『능엄경』을 읽은 적이 있는데 지금은 거지반 잊어먹고 말았어요. 부탁드리건데 한 권만 구해 주시면 저녁에 틈나는 대로 오라버님께 가르침을 청하겠습니다." 영채신은 그러라고 허락했다. 그녀는 여전히 침묵을 지킨 채 앉아 있으면서 한밤중이 될 때까지 가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영채신이 그만 떠나라고 재촉했더니, 그녀는 서글픈 표정이 되어 말했다. "저는 타향에 떨어진 고혼(孤魂)인지라 황량한 무덤으로 돌아가기가 무서워서 그래요." "서재 안에 다른 사람이 잘 수 있는 침상이 없네. 게다가 오라비와 누이동생 사이라면 서로 미심쩍은 짓은 삼가야 하지 않겠나?" 영채신의 따끔한 말에 소천은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양미간에 수심이 어려서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만 같았다. 그녀는 무거운 다리를 끌며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천천히 문밖에 나서더니 계단을 내려서자마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영채신은 그녀가 불쌍해서 집안에 딸로 잠자리를 만들어주고 싶었지만 한편으로 어머님의 꾸지람이 두렵기도 하였다.
소천은 매일 새벽 어머니께 문안을 드리고 대야에 세숫물을 받아 시중을 든 뒤 다른 방으로 물러가 집안일을 했는데, 어느 하나 어머니의 뜻에 거슬리는 것이 없었다. 황혼 무렵이 되면 그녀는 언제나 어머니에게 인사를 드리고 물러 나와 서재로 왔다. 그리고 등불을 밝히고 불경을 읽다가 영채신이 잠자리에 들려는 기색을 보이면 참담한 모습이 되어 물러가곤 하였다. 소천이 오기 전에는 영채신의 아내가 오랜 병으로 누워 있는 바람에 어머니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소천이 온 뒤부터 신세가 매우 편해졌으므로 어머니는 마음속으로 그녀를 몹시 기꺼워하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그녀에게 익숙해지다 보니 소천을 친자식처럼 사랑하게 되었고, 드디어는 그녀가 귀신이란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저녁에 그녀를 혼자 떠나가게 할 수가 없어 마침내는 자기와 한 방에서 기거하게 하였다. 소천은 막 왔을 당시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지만, 반년이 지나자 차츰 묽게 쑨 죽을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어머니와 아들은 모두 소천을 사랑하여 그녀가 귀신임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주위의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오래지 않아 영채신의 아내가 죽었다. 어머니는 소천을 며느리로 들일 마음이 있었지만 아들에게 이롭지 않을까 봐 걱정스러운 마음이 없지 않았다. 소천은 어머니의 염려를 눈치 채고 틈을 보아 이렇게 아뢰었다. "일년이 넘는 세월을 모셔왔으니 응당 저의 사람됨을 아실 것입니다. 무고한 나그네를 해치고 싶지 않았던 까닭에 아드님을 딸라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지요. 저에게 딴 생각은 없어요. 다만 영 공자께서 광명정대하시니 하늘과 사람의 흠모를 한 몸에 받으실 것이므로 저는 그저 그분을 돕고 또 의탁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리하여 몇 년 뒤에 제가 그 덕택에 *봉고(封 )를 받게 된다면 저승에서도 영광스럽지 않겠습니까!" 어머니도 소천에게 무슨 악의가 없다는 것은 알았지만 자손을 두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소천이 말했다. "자녀는 오직 하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사람의 운명을 적은 장부에 아드님에게는 가문과 조상을 빛낼 아들이 셋이나 된다고 쓰여 있으니, 귀신을 처로 삼았다고 해서 그것이 없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그녀의 말을 믿고 아들과 상의했다. 영채신은 매우 기뻐하면서 잔칫상을 차려놓고 친척들을 초대한 다음 그들에게 결혼 사실을 알렸다.
어떤 사람이 신부를 보고 싶다고 말하자, 소천은 대답하게도 화려하게 단장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 나타났다. 모든 사람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천을 쳐다보았는데, 그녀를 귀신이라고 의심하는 게 아니라 선녀가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멀고 가까운 곳을 막론하여 여러 친척들은 다들 예물을 보내와 축하 인사를 하면서 다투어 소천과 사귀려고 하였다. 소천은 난초와 매화를 잘그려 매번 한 폭씩 답례로 선물했는데, 그림을 얻은 사람은 모두 보물처럼 간수하면서 영광으로 생각했다. 하루는 소천이 창문 앞에서 고개를 수그리고 마치 뭔가를 잃어버린 것처럼 답답하고 안타까운 표정을 짓더니 문득 영채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가죽 주머니가 어디 있죠?" "당신이 무서워하기에 잘 싸서 다른 곳에 감춰두었소." "저는 산 사람의 기운을 오랫동안 받아왔기 때문에 더 이상 그것이 무섭지 않아요. 꺼내다 침대맡에 걸어놓는 것이 좋겠어요." 영채신은 무슨 말이냐고 이유를 캐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요 며칠 동안 줄곧 무섭고 불안하기만 할 뿐 마음속이 편치 않아요. 추측컨대 금화의 요물이 제가 멀리 도망친 것을 원망하여 조만간 이곳으로 찾아올 것 같습니다." 영채신이 가죽 주머니를 갖고 오자, 소천은 요모조모 자세히 뜯어본 다음 입을 열었다. "이것은 검선(劍仙)이 사람 머리를 담았던 주머니에요. 이 정도로 해어질 때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알 수가 없군요. 지금 보아도 저는 오싹하고 소름이 끼치네요." 그녀는 즉시 가죽 주머니를 침대 옆에 건사했고 다음날에는 영채신더러 방문 앞으로 옮겨 걸라고 지시했다. 그날 밤 소천은 등불을 마주하고 앉아서 영채신에게 잠들지 말라고 당부했다. 별안간 어떤 물체가 공중에서 새처럼 떨어져 내리자 소천은 놀라며 휘장 안으로 몸을 숨겼다. 영채신이 쳐다보니, 그 물체는 야차처럼 번들거리는 눈깔에 피처럼 새빨간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있었다. 놈은 불꽃을 이글이글 내뿜고 이빨과 발톱을 휘두르면서 앞으로 돌진해 왔다. 방문 앞에 이르자 놈은 뒷걸음질치며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가죽주머니로 다가서더니 마치 잡아채 찢기라도 할 것처럼 손톱을 앞으로 뻗었다. 주머니는 갑자기 "쨍"소리를 내면서 광주리 두 개만 한 크기로 커졌다. 어리어리하는 사이 갑자기 어떤 귀신이 그 안에서 상반신을 내밀더니 야차를 잡아채서 주머니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러자 순식간에 사방이 조용해지더니 주머니 도한 원래의 크기로 오므라들었다. 영채신은 몹시 무서우면서도 신기했다. 소천도 밖으로 나와서는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 더 이상 다른 재난은 없을 거에요!" 둘이 함께 주머니 속을 들여다 보았더니, 맑은 물 몇 되가 고여 있을 뿐이었다. 몇 년이 지난 뒤 영채신은 과연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다. 소천은 아들 하나를 낳았고 영채신이 첩을 들인 뒤 그녀와 첩이 각기 하나씩을 더 낳았다. 세 아들은 모두 벼슬을 했고 명성도 높았다고 한다.
#주
*학사안림: 학사는 공부를 독려하는 사자. 학정(學政)을 감찰했기 때문에 "학정"이라고도 부른다. 과거 시대에는 중앙 정부에서 각 성에 학정을 감찰하는 관리를 파견했고 각 성의 학사는 삼 년의 임기 동안 관할 각 부(府)를 돌며 생원 시험을 보았는데, 이를 "안림"이라고 하였다.
*봉고: 명청의 제도상으로는 일품에서 오 품까지의 관리가 황제의 고명( 命)을 받는 것을 "봉고"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남편이 벼슬길에 올라 아내가 받게 되는 고명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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