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원순 폭행녀 “빨갱이들 토막쳐 북으로 보내야”
- 한겨레
- 입력 2012.01.05 15:40
- 2012.01.05 17:30 수정
- 50대 남성,광주 누가 봤을까?
[한겨레]인터뷰|열렬한 이회창 의원 지지자에서 과격한 '아스팔트 우파'가 된 박명옥씨의 인생역정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도 모두 빨갱이…어디서 돈 받고 왔냐고 물으면 화나"
일명 '박원순 폭행녀'로 불리는 박명옥(63)씨는 인터뷰 전 기자에게 이회창 전 자유선진당 대표를 지지하는지부터 물었다. "그렇지 않은 기자와는 대화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이 의원은 국가보안법 폐지에 반대하는 판사 출신이기 때문에 그가 대통령에 당선돼야 한다"고 했다. 그의 머릿 속에 나라의 안보에 대한 걱정 외에 다른 것은 없어 보였다.
박씨를 만난 건 지난 2일 경기도 안산시의 한 커피숍에서였다. 지난해 11월14일 충남 공주시 치료감호소에서 면회를 통해 만난 뒤 두 번째 만남이었다. 두 달여 전 박씨는 잔뜩 주눅든 채 기자를 만났지만 이날 그의 인상은 한층 밝아져 있었다. 두꺼운 코트 위 왼쪽 가슴에 '한-미 국기 배지'와 '독도사랑'이라고 적힌 배지를 함께 달고 있었다.
(박씨는 지난해 11월 15일 박원순 시장을 폭행해 연행됐으나 경찰은 박씨에게 치료감호소 1개월 수용 처분을 내렸다. 치료감호소는 법원이나 경찰 등에서 정신감정을 의뢰받은 자에 대해 정신의학적 면담, 뇌기능, 임상심리 및 정신·신체적 검사 등을 전문으로 하는 기관이다.)
치료감호소에서 나오면 다시 활동을 시작하겠다고 했던 박씨는 지난해 12월17일 출소한 뒤 12월30일 고 김근태 민주당 상임고문의 빈소에 나타나 또 소란을 피웠다. 그는 "빨갱이들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고 외쳤다.
왜 그랬는지부터 물었다.
"김근태는 김대중·노무현의 앞잡이잖아요. 김대중과 노무현 모두 빨갱이이고 그런 사람들을 추모하러 온 사람들은 다 '빨갱이'예요. 그런 사람들은 대한민국에 살면 안 돼요."
박씨는 철저한 반공주의자다. 그에게 사회주의자는 무조건 '빨갱이'이고 척결대상이다. 그는 한국의 지하 사회에 20만 명의 간첩이 암약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있었던 민주당도 그에게는 빨갱이 정당이다. 그래서 민주당 의원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그에게는 매를 들 대상이다. 박씨는 지난해 8월 청계광장에서 '8·15 반값등록금 실현 국민행동, 등록금 해방의 날'에 참석한 정동영 의원을 때렸고, 천정배·김영환 의원의 보좌관 등을 때리기도 했다. 결국, 지난달 11월 박씨는 민방위 훈련을 시찰하던 박원순 서울시장을 때렸고 경찰에 연행됐다.
"나는 박원순이 빨갱이인 줄도 모르고 아름다운가게에 옷 갖다주고 했었다니까요. 근데 뉴스를 보니까 박원순이 노무현 묘소에 가서 참배를 하더라고요. 노무현한테 절했으니까 빨갱이잖아요. 그때부터 박원순 뒤를 쫓았어요."(박원순 시장은 2011년 9월24일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묘소를 찾아 참배했다.)
'그래도 폭력은 나쁜 것 아닐까.' 박씨에게 이 질문을 하자 그의 목소리와 눈이 커졌다. 거친 단어들이 입밖으로 터져나왔다.
"평화통일을 하려면 빨갱이들 모조리 죽여버려야 해. 토막쳐서 북한으로 보내버려야 해."
박씨에게 빨갱이로 낙인 찍힌 사람들은 맞아도 되는 사람이다. 죽이지 않는 게 다행이라는 식이다. 그는 북한의 무력 통일 기도를 남한의 사회주의자들이 돕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김정일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데. 핵무기 만들어서 우리나라를 다 집어삼키려고 했을 거예요. 나라를 빼앗기면 우리가 노예가 돼요. 북한 노동당을 도우려고 얼마나 많은 빨갱이들이 활개치고 다니는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걸 몰라요. 나는 애국정신으로 활동하는 거예요."
과격 우익단체인 어버이연합도 박씨를 애국자라고 추켜세운다. 박씨는 어버이연합 회원은 아니지만 지난해 5월께부터 어버이연합이 벌이는 집회에 종종 참석해왔다. 어버이연합 회원들은 박씨가 서울 중부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던 지난해 11월17일 그를 찾아 영치금을 넣어주기도 했다. 이날 유치장을 찾았던 강명기 어버이연합 부회장은 "(박씨는) 남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한 애국자다. 원래 나서서 행동하는 사람은 욕을 먹게 돼 있다"고 말했다. 어버이연합은 박씨의 회원가입을 검토했으나 "할머니가 너무 주관이 강해 가입시키지 않았다"고 밝혔다.
많은 사람들은 박씨를 맞닥뜨리면 "당신 어디서 돈 받고 나왔어?"라고 묻는다고 한다. 그는 이런 질문을 받을 때 화가 난다고 했다. 자발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건데 왜 의심하냐고 항변한다.
"배후단체 없어요. 내가 내돈으로 혼자 활동하는 거예요. 아들에게 용돈 받고 오피스텔 임대료 월 40만원씩 받는 걸로 활동하고 있어요."
그가 가입한 정당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그는 열렬한 이회창 의원 지지자이기 때문에 한때 한나라당에 가입하기도 했다. 이회창 의원의 탈당과 함께 지금은 박씨도 당 소속을 옮겼다.
평범한 가정주부의 삶을 살던 박씨가 '아스팔트 우파'로 나선 것은 2002년부터다.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후보에 맞선 노무현 민주당 후보가 지지율에서 앞서나가자 그는 거리로 나서기 시작했다. "빨갱이들이 나라를 또 잡아선 안 된다"는 신념이 그를 움직였다. 공교롭게도 보수 노인들이 2000년대 중반 거리로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던 이유와 비슷하다.
"추운 날씨에도 안산 시내를 다 돌아다니면서 혼자 선거운동을 했어요. 빨갱이들이 또 정권을 잡으면 나라가 위험해질 것 같으니까 무조건 이회창님을 당선시켜야 한다고 호소하고 다녔어요. 올해 대선에서 이회창님이 대통령 되면 남북이 하나 돼서 김정일을 죽이고 우리가 평화 통일을 할 수 있을 거예요."
박씨는 2002년 이후 줄곧 시간이 날 때마다 이곳저곳을 누비며 반공시위를 해왔다. 법원도 찾아가고, 민주당 의원 지역구 사무실도 찾아다닌다. 집회도 웬만하면 빼놓지 않고 찾아다닌다. 박씨는 지난 12월26일 정봉주 전 의원이 입감되던 날 검찰청 앞을 찾기도 했다.
박씨의 이런 반공주의 신념은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박씨가 살아온 길을 더듬어보면 실마리가 보인다. 인터뷰를 통해, 박씨가 한국전쟁 이후 우리사회를 뒤덮고 있던 극단적 반공주의 시대 세계관에 깊이 매몰돼 있었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1949년 강원도 철원군에서 태어난 박씨는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어머니의 등에 업혀 경기도 수원시로 피난 왔다. 당시 국군이었던 박씨의 아버지는 북한군의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났으나 이후 행방불명됐다.
박씨는 평생 김일성에 대한 분노로 살아왔다. 한국전쟁을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전쟁은 그의 가족을 뿔뿔이 흩어지게 했고 오랜 기간 상처를 주었다.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과 그의 아들 김정일은 평생 박씨의 주적이었다. 1960~70년대에 젊은 시절을 보냈던 평범한 남한 사회 시민들에게는 평범한 모습이었다. 그의 반공주의 신념은 기본적으로 50년대 말부터 60년대까지 학교 다닐 때 배웠다. 그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나라를 지켜주었는데 4·19 혁명으로 해외 망명을 떠난 게 아직도 안타깝다고 했다.
'김대중=빨갱이'라는 신념의 기원은 1971년 지나가던 한 동네 할머니로부터 나왔다.
"1971년 박정희와 김대중이 대통령 선거에 나왔을 때 (서울 도봉동에서) 선거벽보를 살펴보고 있었어요. 지나가던 동네 할머니가 김대중은 빨갱이라고 절대 찍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그때부터 김대중이 빨갱이인 것을 알게 됐어요."
'동네 할머니의 말에 근거가 있냐'는 질문을 재차 했지만 박씨는 딱히 대답을 하지 못했다. '사회주의 철학도 다양해서 모든 사회주의자가 북한체제를 옹호하는 건 아니'라고 하자 그는 "그런 사회주의자도 있냐"고 되물은 뒤 "그럴 리가 없다. 그러면 빨갱이들이 왜 김대중을 찍겠냐"고 반문했다.
다소 엉뚱한 경험도 털어 놓았다.
"한번은 안산에서 서울로 전철 타고 가고 있는데 객차 전광판에 갑자기 '평양 만세'라고 뜨는 거예요. 나만 본 게 아니에요. 같이 앉아 있던 아주머니들도 다 봤어요. 그래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전화도 하고 그랬어요. 곳곳에 빨갱이들이 있는 것 같아요."
가족들은 박씨 때문에 애를 태우고 있다. 가족들은 박씨를 한 때 정신병원에 입원시키기도 했다. 2001년 추미애 의원이 이회창 의원을 향해 '이놈' 이라고 말했다는 보도가 나온 뒤 박씨는 가족들에게 "추미애를 때리러 가야겠다"고 말했다. 박씨 가족들은 그때부터 어머니에게 이상이 있다는 생각을 했고 그를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러나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박씨의 아들은 <한겨레>와 한 전화통화에서 "어머니가 공황장애가 있는데 치유가 안 된다. 답답하다"고 말했다.
세상이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는다고 느끼는 박씨는 가끔 외롭다. 11월 그를 면회 갔을 때 그는 기자를 보자마자 눈물을 쏟기도 했다. 교도관이 옆에 지키고 서 있어 기자라고 밝히지 못한 상태였다.
"지금은 온통 빨갱이 세상이에요. 이렇게 날 만나러 와줘서 고마워요. 난 웬만하면 빨갱이들한테 지지 않으려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데 오늘은 너무 감동받아서 눈물이 나네요."
그는 30분간의 면회시간 내내 기자의 두 손을 꼭 붙잡고 울먹였다.
그에게 지금까지 누가 면회를 왔는지 물었다. 어버이연합과 탈북자 단체 회원들 몇몇이 박씨를 찾아왔다고 했다.
박씨의 돌출행동은 왜곡된 역사의 산물인데도, 박씨는 그저 해괴한 행동을 지속하는 일개 노인으로 치부될 뿐이다. 몇몇 방송사들이 박씨가 신기한 듯 카메라를 들고 찾아왔다. 극단적 반공주의 시대가 평범한 사람들에게 남긴 상처가 소비되는 오늘의 방식이다.
허재현 기자 catalunia@hani.co.kr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도 모두 빨갱이…어디서 돈 받고 왔냐고 물으면 화나"
일명 '박원순 폭행녀'로 불리는 박명옥(63)씨는 인터뷰 전 기자에게 이회창 전 자유선진당 대표를 지지하는지부터 물었다. "그렇지 않은 기자와는 대화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이 의원은 국가보안법 폐지에 반대하는 판사 출신이기 때문에 그가 대통령에 당선돼야 한다"고 했다. 그의 머릿 속에 나라의 안보에 대한 걱정 외에 다른 것은 없어 보였다.
(박씨는 지난해 11월 15일 박원순 시장을 폭행해 연행됐으나 경찰은 박씨에게 치료감호소 1개월 수용 처분을 내렸다. 치료감호소는 법원이나 경찰 등에서 정신감정을 의뢰받은 자에 대해 정신의학적 면담, 뇌기능, 임상심리 및 정신·신체적 검사 등을 전문으로 하는 기관이다.)
치료감호소에서 나오면 다시 활동을 시작하겠다고 했던 박씨는 지난해 12월17일 출소한 뒤 12월30일 고 김근태 민주당 상임고문의 빈소에 나타나 또 소란을 피웠다. 그는 "빨갱이들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고 외쳤다.
왜 그랬는지부터 물었다.
"김근태는 김대중·노무현의 앞잡이잖아요. 김대중과 노무현 모두 빨갱이이고 그런 사람들을 추모하러 온 사람들은 다 '빨갱이'예요. 그런 사람들은 대한민국에 살면 안 돼요."
박씨는 철저한 반공주의자다. 그에게 사회주의자는 무조건 '빨갱이'이고 척결대상이다. 그는 한국의 지하 사회에 20만 명의 간첩이 암약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있었던 민주당도 그에게는 빨갱이 정당이다. 그래서 민주당 의원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그에게는 매를 들 대상이다. 박씨는 지난해 8월 청계광장에서 '8·15 반값등록금 실현 국민행동, 등록금 해방의 날'에 참석한 정동영 의원을 때렸고, 천정배·김영환 의원의 보좌관 등을 때리기도 했다. 결국, 지난달 11월 박씨는 민방위 훈련을 시찰하던 박원순 서울시장을 때렸고 경찰에 연행됐다.
"나는 박원순이 빨갱이인 줄도 모르고 아름다운가게에 옷 갖다주고 했었다니까요. 근데 뉴스를 보니까 박원순이 노무현 묘소에 가서 참배를 하더라고요. 노무현한테 절했으니까 빨갱이잖아요. 그때부터 박원순 뒤를 쫓았어요."(박원순 시장은 2011년 9월24일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묘소를 찾아 참배했다.)
'그래도 폭력은 나쁜 것 아닐까.' 박씨에게 이 질문을 하자 그의 목소리와 눈이 커졌다. 거친 단어들이 입밖으로 터져나왔다.
"평화통일을 하려면 빨갱이들 모조리 죽여버려야 해. 토막쳐서 북한으로 보내버려야 해."
박씨에게 빨갱이로 낙인 찍힌 사람들은 맞아도 되는 사람이다. 죽이지 않는 게 다행이라는 식이다. 그는 북한의 무력 통일 기도를 남한의 사회주의자들이 돕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김정일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데. 핵무기 만들어서 우리나라를 다 집어삼키려고 했을 거예요. 나라를 빼앗기면 우리가 노예가 돼요. 북한 노동당을 도우려고 얼마나 많은 빨갱이들이 활개치고 다니는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걸 몰라요. 나는 애국정신으로 활동하는 거예요."
과격 우익단체인 어버이연합도 박씨를 애국자라고 추켜세운다. 박씨는 어버이연합 회원은 아니지만 지난해 5월께부터 어버이연합이 벌이는 집회에 종종 참석해왔다. 어버이연합 회원들은 박씨가 서울 중부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던 지난해 11월17일 그를 찾아 영치금을 넣어주기도 했다. 이날 유치장을 찾았던 강명기 어버이연합 부회장은 "(박씨는) 남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한 애국자다. 원래 나서서 행동하는 사람은 욕을 먹게 돼 있다"고 말했다. 어버이연합은 박씨의 회원가입을 검토했으나 "할머니가 너무 주관이 강해 가입시키지 않았다"고 밝혔다.
많은 사람들은 박씨를 맞닥뜨리면 "당신 어디서 돈 받고 나왔어?"라고 묻는다고 한다. 그는 이런 질문을 받을 때 화가 난다고 했다. 자발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건데 왜 의심하냐고 항변한다.
"배후단체 없어요. 내가 내돈으로 혼자 활동하는 거예요. 아들에게 용돈 받고 오피스텔 임대료 월 40만원씩 받는 걸로 활동하고 있어요."
그가 가입한 정당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그는 열렬한 이회창 의원 지지자이기 때문에 한때 한나라당에 가입하기도 했다. 이회창 의원의 탈당과 함께 지금은 박씨도 당 소속을 옮겼다.
평범한 가정주부의 삶을 살던 박씨가 '아스팔트 우파'로 나선 것은 2002년부터다.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후보에 맞선 노무현 민주당 후보가 지지율에서 앞서나가자 그는 거리로 나서기 시작했다. "빨갱이들이 나라를 또 잡아선 안 된다"는 신념이 그를 움직였다. 공교롭게도 보수 노인들이 2000년대 중반 거리로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던 이유와 비슷하다.
"추운 날씨에도 안산 시내를 다 돌아다니면서 혼자 선거운동을 했어요. 빨갱이들이 또 정권을 잡으면 나라가 위험해질 것 같으니까 무조건 이회창님을 당선시켜야 한다고 호소하고 다녔어요. 올해 대선에서 이회창님이 대통령 되면 남북이 하나 돼서 김정일을 죽이고 우리가 평화 통일을 할 수 있을 거예요."
박씨는 2002년 이후 줄곧 시간이 날 때마다 이곳저곳을 누비며 반공시위를 해왔다. 법원도 찾아가고, 민주당 의원 지역구 사무실도 찾아다닌다. 집회도 웬만하면 빼놓지 않고 찾아다닌다. 박씨는 지난 12월26일 정봉주 전 의원이 입감되던 날 검찰청 앞을 찾기도 했다.
박씨의 이런 반공주의 신념은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박씨가 살아온 길을 더듬어보면 실마리가 보인다. 인터뷰를 통해, 박씨가 한국전쟁 이후 우리사회를 뒤덮고 있던 극단적 반공주의 시대 세계관에 깊이 매몰돼 있었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1949년 강원도 철원군에서 태어난 박씨는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어머니의 등에 업혀 경기도 수원시로 피난 왔다. 당시 국군이었던 박씨의 아버지는 북한군의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났으나 이후 행방불명됐다.
박씨는 평생 김일성에 대한 분노로 살아왔다. 한국전쟁을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전쟁은 그의 가족을 뿔뿔이 흩어지게 했고 오랜 기간 상처를 주었다.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과 그의 아들 김정일은 평생 박씨의 주적이었다. 1960~70년대에 젊은 시절을 보냈던 평범한 남한 사회 시민들에게는 평범한 모습이었다. 그의 반공주의 신념은 기본적으로 50년대 말부터 60년대까지 학교 다닐 때 배웠다. 그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나라를 지켜주었는데 4·19 혁명으로 해외 망명을 떠난 게 아직도 안타깝다고 했다.
'김대중=빨갱이'라는 신념의 기원은 1971년 지나가던 한 동네 할머니로부터 나왔다.
"1971년 박정희와 김대중이 대통령 선거에 나왔을 때 (서울 도봉동에서) 선거벽보를 살펴보고 있었어요. 지나가던 동네 할머니가 김대중은 빨갱이라고 절대 찍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그때부터 김대중이 빨갱이인 것을 알게 됐어요."
'동네 할머니의 말에 근거가 있냐'는 질문을 재차 했지만 박씨는 딱히 대답을 하지 못했다. '사회주의 철학도 다양해서 모든 사회주의자가 북한체제를 옹호하는 건 아니'라고 하자 그는 "그런 사회주의자도 있냐"고 되물은 뒤 "그럴 리가 없다. 그러면 빨갱이들이 왜 김대중을 찍겠냐"고 반문했다.
다소 엉뚱한 경험도 털어 놓았다.
"한번은 안산에서 서울로 전철 타고 가고 있는데 객차 전광판에 갑자기 '평양 만세'라고 뜨는 거예요. 나만 본 게 아니에요. 같이 앉아 있던 아주머니들도 다 봤어요. 그래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전화도 하고 그랬어요. 곳곳에 빨갱이들이 있는 것 같아요."
가족들은 박씨 때문에 애를 태우고 있다. 가족들은 박씨를 한 때 정신병원에 입원시키기도 했다. 2001년 추미애 의원이 이회창 의원을 향해 '이놈' 이라고 말했다는 보도가 나온 뒤 박씨는 가족들에게 "추미애를 때리러 가야겠다"고 말했다. 박씨 가족들은 그때부터 어머니에게 이상이 있다는 생각을 했고 그를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러나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박씨의 아들은 <한겨레>와 한 전화통화에서 "어머니가 공황장애가 있는데 치유가 안 된다. 답답하다"고 말했다.
세상이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는다고 느끼는 박씨는 가끔 외롭다. 11월 그를 면회 갔을 때 그는 기자를 보자마자 눈물을 쏟기도 했다. 교도관이 옆에 지키고 서 있어 기자라고 밝히지 못한 상태였다.
"지금은 온통 빨갱이 세상이에요. 이렇게 날 만나러 와줘서 고마워요. 난 웬만하면 빨갱이들한테 지지 않으려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데 오늘은 너무 감동받아서 눈물이 나네요."
그는 30분간의 면회시간 내내 기자의 두 손을 꼭 붙잡고 울먹였다.
그에게 지금까지 누가 면회를 왔는지 물었다. 어버이연합과 탈북자 단체 회원들 몇몇이 박씨를 찾아왔다고 했다.
박씨의 돌출행동은 왜곡된 역사의 산물인데도, 박씨는 그저 해괴한 행동을 지속하는 일개 노인으로 치부될 뿐이다. 몇몇 방송사들이 박씨가 신기한 듯 카메라를 들고 찾아왔다. 극단적 반공주의 시대가 평범한 사람들에게 남긴 상처가 소비되는 오늘의 방식이다.
허재현 기자 cataluni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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