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글들/교통공사 관련

독일은 월드컵 개최했고 한국은 축제 완성했다

아진(서울) 2006. 6. 20. 08:40

괴테는 라이프치히에서 불멸의 대작 ‘파우스트’를 썼고, 한국은 이 고도(古都)에서 불멸의 역사를 썼다. 우리가 월드컵에서 프랑스와 비겼다. 한국 축구가 세계 정상에 오른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최고봉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지점까지 나아갔다는 신호. 한 달 전 최종 엔트리를 발표하던 날. 서울에 온 히딩크가 말했다. 프랑스와의 경기를 즐기라고.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았다. ‘99%는 한국이 질 것이라는 얘기’라고 했다. 절망적인 선고였다. 아무도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프랑스전을 전략적으로 포기하자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스위스전에 올인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축구협회 주변을 유령처럼 떠돌기도 했다. 한국 대 프랑스. 월드컵 64경기 중 제27호 경기. 암표는 최저 가격 500유로(약 60만원)를 가볍게 넘어섰다. 폴란드 교민들과 덴마크 한인회는 버스를 전세 내 국경을 지났고 체코와 슬로바키아, 심지어 스위스와 스페인의 한국인들도 산맥을 넘고 강을 건넜다. 미국에서 한국을 거쳐 지구를 4분의 3이나 돌아온 가족도 있다. 그 밖에도 무작정 한국이 좋아서, 사업 관계상, 친구와 배우자를 따라, 입양한 자녀들에게 좋은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어서, 그리고 40년 전 떠나온 조국의 청년들이 모두 다 아들 같고 손자 같아서 사람들은 하나 둘 라이프치히로 모여들었다. 병원 지하의 영안실에서 시신을 닦던 앳된 간호사500m 땅 밑에서 목숨을 걸고 탄을 캐내던 광원들의 두 손엔 지금 알코올 솜과 곡괭이 대신 태극기가 들려 있다. 여기선 열 몇 시간 운전으로는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그런데 이들 대부분이 경기 입장권 한 장 없이 무작정 길을 나선 사람들이라는 걸 믿을 수 있는가. 태극 전사와 한 발이라도 더 가까운 곳에 있고 싶어서, 거리 응원이라도 하고 싶어서 생업을 잠깐 접어놓고 어떻게든 달려온 우리 겨레들. 이러한 정성에 화답하듯 대한의 건아들은 프랑스의 푸른 군대와 대등하게 맞서며 미드필드로 진군했다.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관중석 한가운데서 태극기가 날개를 펼 때 우리 전사들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 한 자락. 그 빛나는 자신감을 불안하다고 여겼던 건 우리들의 기우였다.

누군가는 우리의 성취를 한국형 압박 축구의 개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압박이 아니었다. 축구공을 가지고 펼쳐 보인 거대한 강강술래기차놀이였다. 진양조에서 중중모리를 거쳐 휘모리장단으로 파고든 뜀박질이었다. 우리의 말발굽 아래 게르만 초원의 갈리아 전사들은 힘을 잃었다.

신은 축구를 만들었고, 인간은 축구를 완성했다. 독일인은 월드컵을 개최했고, 한국인은 축제를 완성했다. 형형색색의 머릿결과 눈동자가 모여 밤새도록 기차놀이로 강강술래를 타고 도느라 라이프치히의 밤은 지금 태극 무늬를 그리며 저물어간다. 세계와 함께하는 대한민국,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을 때까지 나는 알코올 솜과 곡괭이를 쓰다듬으며 눈물 흘릴 테다. 자, 이제 눈물을 닦고, 가자 스위스로, 알프스를 넘어서!(라이프치히=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2006.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