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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선동열은 알고 정운찬은 몰랐던 '왕관'의 무게

아진(서울) 2018. 11. 14. 23:01

일간스포츠

배영은 입력 2018.11.14. 17:46 수정 2018.11.14. 18:10

 
[일간스포츠 배영은]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영국의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희곡 '헨리 4세'에 이런 대사를 썼다. 높은 자리에 오르려면 반드시 그 위치와 권한에 걸맞은 자격과 책임이 따라야 한다는 얘기다. 국가대표 감독도 뼈저리게 통감했던 그 왕관의 무게. 과연 한국 프로야구 전체를 관장해야 하는 KBO 총재는 느끼고 있었을까.

선동열(55) 국가대표 감독이 사퇴했다. 14일 서울 도곡동 야구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가대표 야구 감독직에서 스스로 물러나겠다"고 발표했다. 지난해 7월 한국 야구 사상 최초의 국가대표 전임 감독으로 부임한 지 1년 4개월 만이다. 기자회견을 불과 한 시간 여 앞두고 각 언론사 취재진에 긴급 공지됐고, 선 감독은 기나긴 사과문을 다 읽는 대신 1분을 조금 넘는 짧은 소감만 남기고 자리를 떴다.

쓸쓸한 뒷모습이다. 한국 야구의 숙원이던 국가대표 전임감독제가 마침내 도입되고, 선 감독이 첫 주자로 선택됐을 때만 해도 야구계는 "적임자를 뽑았다"며 반겼다. KBO는 2020년 도쿄 올림픽까지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고, 선 감독은 "프로 구단에서 감독 제의가 와도 가지 않겠다"며 의지를 불태웠다. 하지만 지난 8월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을 전후로 선 감독과 야구대표팀을 향한 시선이 싸늘해졌다. 기자회견문에 담긴 여러 과정을 통해 선 감독이 국정감사 일반 증인으로 출석하기에 이르렀고, 손혜원 국회의원은 명확한 근거 없이 선 감독에게 "사과하거나 사퇴하시라"고 호통을 쳤다. 선 감독은 그렇게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더 큰 흠집은 그 뒤에 났다. 2주 뒤 정운찬 KBO 총재가 같은 사안으로 국정감사에 출석해 또 다시 손 의원 앞에 섰다. 정 총재는 이 자리에서 놀랍게도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전임감독제가 한국 야구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내가 부임하기 전에 결정된 일"이라는 발언을 했다. 'KBO 총재' 자격으로 출석한 인사가 '개인적인 의견'을 강조하며 발뺌을 했다.

더 나아가 손 의원이 TV로 선수들을 지켜본 선 감독의 업무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자 "나도 그건 선 감독의 불찰이라고 생각한다"고 공감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특정 경기장에 나가면 단 한 게임밖에 볼 수 없고, 괜히 선수들이 긴장하거나 불필요한 오해를 살 수 있다. 오히려 TV 4분할 화면으로 여러 경기를 동시에 보는 게 업무에 도움이 된다"던 선 감독의 해명은 총재의 '사견' 속에 묻혔다.

정 총재의 국정감사 출석 이후 많은 취재진 사이에선 "내가 선 감독이라면 당장 사퇴하고 싶을 것"이라는 대화가 심심찮게 오갔다. 대표팀에 쏟아지는 화살을 홀로 감당하며 버티던 선 감독이지만, '외부인'이 아닌 KBO 총재가 자신의 존재를 전면 부정했다는 사실에는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해석 때문이다.

끝까지 '식구'를 감싸 안은 선 감독과 나 살기에 급급한 정 총재의 태도가 극명히 비교돼 더 그랬다. 선 감독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과 먼 길을 동행했던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을 등 뒤로 숨기고 감쌌다. 특정 선수 선발을 특정 코치가 주장했다는 의혹이 일자 "선수 선발은 전적으로 감독의 권한이자 책임이다. 오지환은 내가 원해서 뽑은 선수"라고 일축했다. 물러나는 순간에도 "선수들의 자존심과 금메달의 명예를 되찾아주고 싶다"고 강조했다.

선 감독은 기자회견을 30분 앞두고 정 총재를 찾아갔다. 문제의 국정감사 이후 첫 만남. 사퇴 의사를 전했다. 총재가 만류했지만, 감독의 의지는 굳건했다. 선 감독이 기자회견장을 떠난 뒤, 장윤호 KBO 사무총장은 기자들의 청에 따라 단상에 섰다. 선 감독의 사퇴를 안타까워하면서 "총재님이 선 감독을 문밖으로 따라 나서면서까지 말렸다"는 변명을 했다. '왜 (바로 2층 아래 있는) 총재가 직접 올라 오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총재님이 많이 놀라셔서 경황이 없으시다"고 했다. 총재는 끝까지 책임을 회피했고, 사무총장은 그런 총재를 변호하는 데만 초점을 맞췄다.

무엇보다 KBO는 지금 사면초가에 빠졌다. 총재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전임감독제를 뿌리부터 부정한 상황에다 첫 전임 감독은 참담한 모습으로 떠났다. 이제 정 총재와 장 사무총장은 국가대표팀을 위해 어떤 대안을 내놓을까. 그 대책은 현재보다 훨씬 나을까. 지켜 볼 일이다.

배영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