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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역사 속 스포츠] 1982년 11월 14일 김득구 경기 중 의식불명, 불꽃같은 삶

아진(서울) 2017. 11. 12. 11:31

[이번 주 역사 속 스포츠] 1982년 11월 14일 김득구 경기 중 의식불명, 불꽃같은 삶

박태훈 입력 2017.11.12. 07:01

김득구(호적상 1955년 1월 8일생)는 한국 프로복싱계의 아픈 이름이다.

1982년 11월 14일(미국 현지시간 13일) WBA라이트급 타이틀매치 중 14회에 쓰러져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뒤 뇌수술까지 받았으나 99시간 뒤인 11월 18일 사망했다.

경기 주심을 맡았던 리처드 그린도 '위험한 상태에 빠졌음에도 경기를 중단시키지 않아 김득구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7개월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WBA 라이트급 타이틀매치 14회에 맨시니의 펀치를 맞고 쓰러진 김득구가 로프를 잡고 안간힘을 다해 일어서려 하고 있다. 눈의 초첨을 잃는 등 의식을 완전히 잃어 버린 상태였지만 '싸우겠다'는 강한 정신력이 본능적으로 그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의학계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라고 했다. 그만큼 김득구는 강했다.

[이번 주 역사 속 스포츠] 1982년 11월 14일 프로복서 김득구 경기 중 의식불명, 나흘 뒤 사망

▲ 불꽃처럼 살다간 김득구

김득구(호적상 1955년 1월 8일생)는 한국 프로복싱계의 아픈 이름이다.

1982년 11월 14일(미국 현지시간 13일) WBA라이트급 타이틀매치 중 14회에 쓰러져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뒤 뇌수술까지 받았으나 99시간 뒤인 11월 18일 사망했다.

전세계에 생중계된 방송에서 쓰러져 사망한 김득구 사건은 스포츠계를 큰 충격 속에 빠뜨렸다. 

미국 언론들이 대책마련을 촉구하고 나섰고 미국 하원이 관련 청문회까지 열었다.

이후 선수보호를 위해 세계 챔피언 타이틀매치가 15회에서 12회로 줄어들었고 '스탠딩 다운'제도가 도입됐다.

▲ 다운돼 의식불명 상태에서도 '싸워야 한다'며 로프를 잡고 일어서던 불굴의 투혼

의식불명 상태에서도 김득구가 싸우겠다고 무의식적으로 일어서려는 순간, 당시 주심 리처드 그린이 카운트 '10'이 끝났다며 KO를 선언하고 있다.   주심을 봤던 그린은 일찍 경기를 중단시키지 못해 김득구가 숨졌다는 자책감에 경기 7개월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미국 라스베이거스 시저스팰리스 호텔 특설링에서 열린 경기에서 당대의 권투스타 레이 맨시니(미국)과 외롭게 맞선 김득구는 9회를 넘기면서 열세에 몰렸다.

13회 그로기 직전까지 간 김득구는 14회가 시작되자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다.

맨시니는 발걸음이 둔해진 김득구를 향해 레프트 카운트 펀치에 이어 오른손 훅성 스트레이트를 날렸다.

양팔을 대(大)자로 벌린 채 쓰러진 김득구는 심판의 카운트 소리에 무의식적으로 반응, 로프를 붙잡고 일어섰지만 이미 그의 눈은 초점을 잃었고 심판은 '10'을 외친 뒤 경기 종료를 알렸다.

그 순간 김득구는 로프를 잡으면서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고 중계방송 화면은 이 장면을 다 담지 못하고 펄쩍 뛰며 좋아하는 맨시니 쪽으로 초점을 맞췄다.

▲ 김득구 뒤 따라 죽음 택한 어머니와 주심, 상대 맨시니도 깊은 우울증에 빠져 

실력과 잘생긴 외모로 당시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매니니가 강력한 왼손 훅을 김득구 옆구리에 명중시키고 있다.  굶주림을 참아가며 세계정복에 나섰던 김득구는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미국땅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아들 김득구가 데저트스프링스병원으로 옮겨져 뇌수술을 받았지만 의식불명이라는 말에 어머니는 급히 미국으로 날아갔다.

어머니는 식물인간 상태에 빠진 아들이 소생 불가능하다는 말에 '산소 호흡기'를 떼는 것에 동의하고 장기를 동양계 미국인들에게 기증했다.

김득구의 어머니는 3달 뒤 '내가 가난해서 아들이 복싱을 시작했다. 내가 아들을 죽인 셈이다'라는 유서와 함께 삶을 마감했다.

경기 주심을 맡았던 리처드 그린도 '위험한 상태에 빠졌음에도 경기를 중단시키지 않아 김득구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7개월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레이 맨시니도 김득구 죽음에 큰 충격을 받고 깊은 우울증에 빠졌으며 슬럼프로 이어지자 복싱을 그만두고 영화배우의 길을 택했다.

▲ 두 살 때 아버지 여의고 어렵게 복싱

김득구는 2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눈칫밥을 먹던 중 14살 때 가출, 서울로 상경해 구두닦이 등 허드렛일을 하다가 복싱에 입문했다. 데뷔 이후 1년 만에 라이트 플라이급 한국 챔피언, 82년 2월 28일 동양챔피언에 돼 세계랭킹 1위까지 올랐지만 채 꽃을 피우지 못하고 허망하게 지고 말았다.

▲ 29년 후 맨시니, 치과의사로 늠름하게 자란 김득구 유복자와 눈물의 상봉 

김득수 사망 뒤 깊은 슬럼프에 빠져 결국 은퇴한 맨시니는 오랜 세월 자책감에 시달리다가 2011년 6월 김득구의 유복자인 김지완(오른쪽)을 수수문, 미국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는 것으로 어느정도 마음의 빚을 들어냈다.

김득구 사망에 죄책감을 갖고 있던 맨시니는 2011년 6월 23일 미국 자신의 집(캘리포니아 샌타모니카)에서 김득구의 아들 지완(1982년생)씨와 만났다.

맨시니는 훌륭하게 자라준 지완 씨를 보자 눈물을 쏟아내면서 "이제 비로소 편히 살 수 있을 것 같다"라는 말로 그동안의 마음고생을 털어냈다.

김득구 사망 당시 어머니 뱃속에 있었던 유복자 지완 씨는 치과대학을 졸업, 현재 치과의사로 일하고 있다.

박태훈 기자 buckba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