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전 오늘 검거된 '살인공장' 지존파 사건 기억하시나요
입력 2018.09.21. 11:26 수정 2018.09.21. 16:16
엽기적 살인 행각 벌인 7인조 '지존파' 검거
[한겨레]
그때도 추석 연휴였습니다. 갑자기 날아든 범죄 소식은 온 나라를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연휴 첫날 알려진 ‘그들’의 존재는 추석 연휴 마지막 날 그 실체를 드러냈습니다.
“인육을 먹은 게 사실이다 . 나는 인간도 아니다 .” “어머니도 내 손으로 못 죽인 것이 한이 된다 .”
오늘로부터 24년 전인 1994년 9월21일, 엽기적인 살인 행각을 벌인 7인조 ‘지존파’가 경찰에 검거됐습니다. 이들은 취재진의 카메라 앞에서 시종일관 당당함을 보였습니다. 심지어 미소를 띠며 반사회적, 반인륜적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 모습에서는 섬뜩함마저 느껴졌습니다.
모두 20대로 이뤄진 이들은 1993년 7월 도박판에서 두목 김기환을 만나 ‘지존파’라는 범죄 조직을 결성했습니다. 그리고는 부유층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심을 내세우며 무고한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끔찍하게 살해했습니다.
지존파의 범행은 우발적으로 저질러진 게 아니었습니다. 치밀하게 준비된 반인간적 계획범죄였습니다. 범행 수법과 내용을 보면, 당시 한국 폭력조직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선진적인 범죄능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지존파 사건이 당시 한국 사회에 던진 충격은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존파 범행, 어떻게 알려졌나
지존파의 연쇄살인을 멈출 수 있었던 건 한 시민의 용기 있는 행동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지존파가 경찰에 체포되기 2주 전인 9월8일, 20대 여성 이아무개씨는 자신의 남자친구 이아무개씨와 함께 지존파에 납치됐습니다. 경기도의 한 국도에서 드라이브하던 중 지존파 일당이 이들의 차를 가로막고 가스총을 쏴 실신하게 한 뒤 ‘아지트’로 옮긴 것입니다.
지존파 일당은 납치한 이씨를 집단 성폭행하고, 이씨 일행에게서 돈이 없는 것으로 확인되자 이씨의 남자친구를 살해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씨를 강제로 살해 범죄에 가담하게 해 공범으로 활용했습니다. 지존파는 그로부터 엿새 뒤 소아무개씨를 살해하면서 다시 이씨를 살인의 도구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이씨가 지존파에 끌려간 지 8일 만인 9월15일 극적인 탈출 기회가 왔습니다. 지존파 일당 중 김현양이 무기를 만지다 상처를 입자 이씨는 “내가 간호를 하겠다”며 김씨와 함께 읍내의 한 병원으로 따라나섰습니다. 이씨는 지존파 일행의 감시가 허술해진 틈을 타 병원을 나와 인근 마을로 내달렸습니다. 이곳에서 한 과수원 주인의 보호를 받은 이씨는 택시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생지옥을 넘나든 이씨의 악몽 같은 8일이 끝나는 순간이었습니다.
비밀 아지트에 지어진 ‘살인공장’
이씨의 신고로 드러난 지존파의 범행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잔혹했습니다. 지존파는 무고한 시민을 납치해 살해한 뒤 주검을 토막 내 불로 태웠습니다. 이를 위해 비밀 아지트를 지어 지하에 감금용 철장과 사체 소각용 화덕을 설치한 뒤 공기총과 다이너마이트, 가스총 등의 범행 도구도 갖추었습니다.
경찰 조사 결과 지존파는 범행을 위해 혹독한 준비 과정을 거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들은 조직의 단결을 위해 산에서 1주일 간 물과 풀뿌리만 먹는 ‘지옥훈련’을 버텼습니다. 아울러 공기총에는 항상 실탄을 장전해 가지고 다니며 수시로 사격 연습도 했습니다. 심지어 지존파는 기관총과 사체 운반용 특장차 구입, 범행 연습을 위한 중국 전지훈련도 계획했던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지존파는 본격적인 범행에 앞서 담력을 키우기 위한 목적으로 젊은 여성을 납치, 성폭행한 뒤 살해했습니다. 부인이 보는 앞에서 남편을 총으로 쏴 죽이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특히 “배반한 자는 무조건 죽인다” 등의 원칙을 세우고 조직을 이탈한 동료는 죽음으로 응징하기도 했습니다.
부유층에 보인 강한 적대감
지존파 일당은 모두 가난한 농촌에서 자라나 중·고등학교를 중퇴한 뒤 대부분 막노동일로 생계를 이어나갔습니다.
당시 이들을 수사한 관계자는 이들이 “한 달에 몇백만 원씩 쓰는 부유층을 보면 분노가 치밀어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고 말했다며 “빈농 출신의 성장 배경이 심한 소외감과 부유층에 대한 증오심을 키운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가진 자의 것을 빼앗고, 그들을 죽인다”는 지존파의 행동 강령도 부유층에 대한 이들의 증오감이 드러나 있었습니다.
부의 편중이라는 사회적 분위기와 지존파 일당의 윤리의식 부재가 더해진 결말은 무차별적인 살인극으로 이어졌습니다. 지존파가 검거되기 전까지 최소 5명의 무고한 시민들이 이들에 의해 희생되었습니다.
지존파의 첫 범행은 1994년 7월 일어났습니다. 앞서 말했듯 이들은 살인 연습을 한다며 20대 여성을 납치, 성폭행한 뒤 목을 졸라 살해해 인근 야산에 암매장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범행 뒤 양심의 가책에 시달린 동료 송아무개가 공동 예금통장에서 300만 원을 인출해 도주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지존파 일당은 송씨를 추적해 붙잡은 뒤 단검과 곡괭이 등으로 잔인하게 살해하고 주검은 근처 산에 암매장했습니다.
이후 지존파는 잔인한 연쇄살인 행각을 본격화했습니다. 9월8일에는 경찰에 이들을 신고한 장본인인 이아무개씨와 그의 남자친구를 납치했습니다. 지존파 일당은 이아무개씨의 남자친구에게 소주를 강제로 먹인 뒤 목 졸라 살해했습니다. 그 뒤 이들이 원래 타고 있던 승용차에 사체를 실어 계곡 아래로 떨어뜨려 교통사고로 위장했습니다.
이어 9월13일에는 공동묘지에서 벌초하고 있던 소아무개씨 부부를 납치했습니다. 지존파 일당은 소아무개씨의 몸값 8000만 원을 받아낸 뒤 소씨는 공기총으로 쏘아 살해하고, 소부인 박아무개씨는 도끼로 내리쳐 살해, 사체는 이들의 ‘살인공장’ 지하 소각장에서 불로 태웠습니다.
범행에 노출된 개인 정보
지존파 사건은 국민들을 큰 충격과 불안에 휩싸이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잔인한 범행 수법은 물론이거니와 경찰 수사 과정에서 사회 곳곳의 문제점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지존파는 범행 대상자를 물색하기 위해 서울 강남의 유명 백화점 고액 거래 고객과 고액 카드 사용자 명단을 확보했습니다. 고객 명단 유출은 내부의 도움 없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느슨한 관리 실태가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지존파 일당이 확보한 고객 명단은 고객의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뿐만 아니라 거래 액수까지 상세하게 포함된 것이었습니다. 지존파는 특히 “하루 600만~700만 원어치의 물품을 구입하는 사람들을 우선적인 범행 대상으로 지목했다”고 진술하기도 했습니다.
경찰은 사건이 터지자 뒤늦게 고객 명단의 유출 경위와 명단에 이름이 적힌 사람들의 피해 여부 확인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국민들은 각종 정보의 불법 유출이 범죄에 악용돼 무고한 시민들의 희생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고객 정보 유출은 법으로 엄격히 규제되어 있었지만 그때까지 처벌받은 일은 단 한 건도 없었습니다. 법 규정만으로는 유출 행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얘기입니다.
미흡한 경찰 수사
경찰의 대처능력 또한 흉악범죄에 대한 공포감을 더욱 키웠습니다. 지존파 일당은 근거지에 ‘살인공장’까지 갖춰 놓고, 1년 3개월여 동안 전국을 누비며 4차례의 범행을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경찰은 지존파 피해자 이아무개씨가 탈출해 제보해올 때까지 이들의 존재를 전혀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경찰은 소씨 부부 납치 사건 직후 사건의 방향을 잘못 잡아 초동수사를 게을리 한데다 공조 수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경찰은 첫 제보 당시 납치 사실보다는 신고 내용의 진위에 초점을 맞춰 수사를 진행했습니다. 처음 제보를 해온 사람은 소씨 회사의 영업부장 신아무개씨였습니다. 신씨는 사건 발생 직후 “광주에서 소사장을 만나 현금 8000만 원을 건네줬으며, 소사장이 납치된 것 같다”고 경찰에 알렸습니다. 하지만 경찰은 신씨가 회사 돈을 빼내기 위해 거짓 신고를 했을 가능성에 대해서만 수사를 벌이다 결국 소씨 부부의 희생을 막지 못했습니다.
지존파가 납치, 살해한 뒤 음주운전 사고로 위장한 이아무개씨에 대해서도 타살 의혹이 명백했지만 경찰은 단순 교통사고로 처리했습니다. 당시 경찰은 “피해 물품이 없고, 피해자 입에서 술 냄새가 났다”는 등의 이유를 들었습니다.
게다가 지존파 일당의 근거지인 ‘살인공장’은 경찰 검문소와 지서에서 각각 3㎞와 2㎞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직업이 명확하지 않은 20대 초반의 젊은이 5명이 함께 기거하며 외지 차량 출입이 잦았는데도 검문검색 한 번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이곳의 집주인 지존파 두목 김기환은 당시 동네 여중생을 성폭행한 혐의로 수감 중인 상태였습니다.
지존파 사건이 남긴 것
지존파 일당은 끝까지 뉘우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검찰은 논고문에서 “피고인들은 불특정 다수를 범행 대상으로 선정해 잔혹하고 끔찍한 방법으로 살해했고,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 소각로까지 설치해 사체를 태운 것으로 볼 때 인간이길 포기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뉘우침의 기색마저 없는 이들을 우리 사회로부터 영원히 격리시켜야 마땅하다”고 밝혔습니다.
결국 7명 가운데 범죄 단체 가입 및 사체손괴죄를 적용받아 징역 5년을 구형받은 이경숙을 제외한 6명에 대해서는 이듬해인 1995년 11월3일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검찰은 지존파 사건을 계기로 뒤늦게나마 강력 사건의 피해자나 증인을 보호할 수 있는 법적·제도적인 방안 마련에 나섰습니다. 검찰의 이런 조처는 살인과 마약, 강간 등 강력사건의 경우 피해자들과 증인들이 범인들의 보복을 두려워해 신고를 기피한다는 데 따른 것이었습니다.
아울러 ‘지존파 사건’은 모든 국민이 인명 경시 풍조와 물질 만능 주의, 치안 부재 현상 등 대한민국 사회 곳곳의 민낯을 돌아보게 만든 계기가 되었습니다.
강민진 기자 mjk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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