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군부는 '자백'한다..5월 학살, 시작과 끝은 '전 장군'이라고 [단독-신군부 비밀 책자 입수]강현석·배명재 기자 입력 2018.10.05. 06:01 수정 2018.10.05. 07:25
[경향신문] ㆍ1980년 5월19일 군수뇌부 회의서 공수여단 투입 승인
ㆍ21일 계엄군 자위권 발동·최규하 25일 광주행 ‘결정’
ㆍ“전두환의 합수부에 매일 광주 상황 보고” 낱낱이 기록
“광주사태는 6·25 이래 한국 현대사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국민적 비극이었다.” <제5공화국 전사> 4편 ‘광주사태의 교훈’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4일 현재 정부로부터 5·18민주화운동 사망자로 인정받은 시민은 353명(사망 166명·상이 후 사망 111명·행방불명 76명)에 이른다.
그렇다면 비극을 초래한 자들은 누구인가. 경향신문이 전권을 모두 입수한 <제5공화국 전사>는 ‘비극’의 주모자로 전두환 전 대통령(87)을 가리키고 있었다. ‘전 장군’은 <5공 전사> 5·18 부분에서 모두 3번 직접 언급된다.
그는 2개 공수여단의 광주 추가 투입이 결정된 5월19일부터 군 수뇌부 회의에 참석했다.
5월21일에는 발포명령과 다름없는 계엄군의 자위권 발동을 결정하는 회의에도 참석했다. 전남도청 무력진압작전을 이틀 앞둔 5월25일 최규하 대통령의 광주행을 결정한 것도 그였다.
전 전 대통령은 지난해 발간한 회고록에서 자신을 “(5·18) 치유와 위무를 위한 씻김굿에 내놓을 제물”이라고 했다. 그는 “나의 유죄를 전제로 만들어진 5·18특별법과 그에 근거한 수사와 재판에서조차도 광주사태 때 계엄군의 투입과 현지에서의 작전지휘에 내가 관여했다는 증거를 찾으려는 집요한 추궁이 전개됐지만 모두 실패했다”고도 했다. 하지만 신군부 세력이 직접 기록한 <5공 전사>는 그의 유죄를 입증하고 있다.
전 전 대통령은 5월19일부터 하루 걸러 열린 군 수뇌부 회의에 참석했다. <5공 전사>에 따르면 그날 계엄사령부는 전북에 위치한 35사단에 전북과 전남의 도로를 통제할 것을 지시해 광주 소식이 ‘북상’하는 것을 막았다. 또 20일부터는 20사단을 광주에 추가 투입하기로 했다. 노태우(수경사령관)·정호용(특전사령관) 등 신군부 핵심도 참여한 회의 분위기에 대해 <5공 전사>는 “이들의 논의는 신중하면서도 진지한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5월21일에는 국방장관실에서 발포명령인 ‘자위권 발동’을 결정하는 회의가 열렸다. 회의에는 ‘합수본부장 겸 보안사령관 전두환 장군’도 참석했다. <5공 전사>는 “2군사는 육본으로 올라와 참모총장을 뵙고 현장의 어려운 상황을 설명하고 자위권 발동을 건의하였다. 건의를 들은 참모총장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라고 하면서 장관에게 직접 보고하자고 하여 국방장관실로 갔다. 장관실에는 장관을 비롯하여 합참의장, 합수본부장 겸 보안사령관 전두환 장군, 수경사령관, 육사교장, 특전사령관 등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또 “계엄군의 자위권 행사 문제는 그 회의에서 자동적으로 결정되었다”고 적었다.
전남도청 무력진압작전을 이틀 앞둔 5월25일 최규하 대통령의 광주 방문도 전 전 대통령이 최종 결정했다. <5공 전사>는 “최 대통령의 대광주시민 방송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한 합수본부 안전처장은 24일 당시 국방장관 및 각 군 참모총장과 광주사태에 관한 회의에 참석하고 있는 합수본부장 전두환 장군께 보고키 위하여 국방부로 갔다”면서 “‘최 대통령의 광주 선무활동이 시급히 필요하다’는 건의를 하자 전 장군은 ‘그것 참 좋은 생각이다’라고 희색을 띄우면서 국방장관에게 건의했고 국방장관은 그 길로 청와대로 직행, 최 대통령에게 건의하였다”고 기록했다.
전 전 대통령은 “5월19일 이후 정보 기능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당시 합수부와 보안사가 ‘눈과 귀’ 역할을 했다. <5공 전사>에는 “매일 광주로부터 사태 진전에 관한 보고를 받고 있었던 합수본부 안전처”나 “현지 상황을 직접 보고받고 처리하는 육본이나 합수본부의 실무처장급 참모”라는 표현이 나온다. 계엄군의 모든 작전 상황이 전 전 대통령이 본부장이던 합수부로 동시에 보고되고 있었던 것이다.
보안사는 도청 무력진압작전계획인 ‘상무충정작전’에 대해 육군본부의 계획을 먼저 보고받은 뒤 동의하기도 했다. 육본은 보안사의 동의를 받은 뒤 계엄사령관을 찾아가 작전을 건의했다. 또 보안사는 국방부 보안부대장을 통해 무력진압계획이 조기에 실시될 수 있도록 장관을 압박했다.
전 전 대통령의 5·18 지휘는 <5공 전사> 외에 계엄군에 지급된 격려금을 기록한 보안사 문건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이 문건에 따르면 최규하 대통령과 이희성 육군참모총장이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 부대에 각각 3000만원씩 격려금을 지급했고, 전두환 보안사령관도 이들과 함께 300만원의 격려금과 소 7마리를 중식용으로 내려보냈다. 노영기 조선대 교수는 “전두환은 당시 군을 비롯해 국내의 모든 정보를 장악하고 있던 실권자였다”면서 “신군부가 기록한 <5공 전사>에 일부 오류가 있을 수 있지만 최고 실권자의 행적은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했다.
강현석·배명재 기자 kaj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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