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짐을 진 피난민들이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폭파된 한강철교 옆에 임시로 놓인 부교 위를 건너고 있다. 피난민들은 소에 짐을 싣고 가다 식량이 떨어지면 잡아먹기도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
[사람이 중심이다]
세월호 참사 특별기고
한홍구 교수 역사와 책임 ①
세월호는 우리에게 준엄한 물음을 던진다. 책임이란 무엇인가? 역사 앞에서 책임을 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속옷 바람으로 도망치는 어처구니없는 선장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저 기막힌 모습을 우리는 역사의 굽이굽이에서 많이 보아왔다. 어쩌면 저 징글징글한 모습을 되풀이해서 또 보게 될는지도 모른다. ‘세월호의 악마’라 불린 선장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가 생생하게 동영상으로 되풀이해서 보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의 역사 속에 세월호의 악마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악마들은 너무도 많았다. 어찌 도올 선생 글에서 지적된 임진왜란 당시의 선조나 한국전쟁 때의 이승만뿐이랴.
세월호 사건이 있기 바로 전, 우리 사회는 태안 앞바다에서 해병대 캠프에 참가했던 고등학생 5명이 파도에 휩쓸려 숨지는 비극을 겪었고, 두 달 전에는 경주에서 리조트 체육관이 붕괴하여 대학생 10명이 숨지는 비극을 겪었다. 이런 사전 경고음에도 불구하고 세월호라는 사고가 또다시 터지니 참담하고 황망하기 짝이 없다. 서너 달 지나면 앞의 사고들이 그랬던 것처럼 세월호 사고도 잊혀져버리는 것일까? 세월호 사고가 경고음이 될까봐 불안하다. 세월호가 가라앉던 바로 그날, 핵마피아가 포함된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설계수명이 다한 핵발전소 고리 1호기의 재가동을 승인했다. 규제 완화?수명 연장-납품비리-마피아의 상호 묵인…. 예고된 인재의 모든 것이 그대로다. 21년 전 서해훼리호 사건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운 것일까? 사고가 터지면 그때만 이것저것 대책이 난무할 뿐, 사고는 또다시 망각의 함정에 빠진 우리를 덮쳐온다. 책임져야 할 사람들의 무책임, 끼리끼리 해먹는 ‘해피아’, 인명 경시, 안전 불감증…. 하나하나의 진단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진짜 문제는 이런 문제들이 서로 얽히고설켜 있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하다는 점이다. 혁명을 통해 단칼에 얽힌 매듭을 끊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고통스럽지만 찬찬히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들이 얽혀온 과정을 돌아보아야 한다. 세월호 사건 이후 많이 이야기된 것이지만 1950년 6월 북한군의 전면 공세 이후 대통령 이승만이 서울을 버리던 무렵으로 돌아가보자.
우리의 역사 속에 세월호의 악마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악마들은 너무도 많았다. 1950년 6월 북한군의 전면 공세 이후 대통령 이승만이 서울을 버리던 무렵으로 돌아가보자.
가만있으라 세월호에, 가만있으라 서울에
세월호 선장 이준석이 그랬던 것처럼 이승만은 북한의 공격으로 함락 위기에 빠진 수도 서울에서 제일 먼저 달아난 사람이었다. 전쟁이 발발하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던 호언과는 달리 국군은 속수무책이었다. 27일 새벽 1시에 소집된 비상국무회의에서는 서울시민의 피난에 대한 계획은 세우지 않고, 수원 천도를 결정했다. 새벽 3시, 국군통수권자 이승만은 경무대를 떠나 피난길에 올랐다. 이승만을 태운 특별열차는 수원에 멈추지 않았다. 새벽 5시 대전을 통과하여 오전 10시, 대구에 도착했다. 누군가가 “각하, 너무 많이 오셨습니다”라고 진언한 게 틀림없다. 평양이 아니라 대구에서 점심을 드신 이승만은 기차를 돌려 대전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날 저녁, 장거리 전화로 서울의 중앙방송국을 연결해 “유엔에서 우리를 도와 싸우기로 했으니 국민들은 안심하라”는 내용의 방송을 녹음했다. 케이비에스(KBS)는 이 방송을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할 때까지 내보냈다고 한다. 이승만은 방송에서 자신이 대전에 내려와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시민들은 그가 자신들과 함께 서울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라고 착각했다.
방송만이 아니었다. 신문도 잘못된 정보를 쏟아내고 있었다. 6월27일치 <동아일보>는 “국군정예 북상 총반격전 전개”라는 제목으로 국군이 해주시를 완전히 점령했다고 보도했고, 같은 날 <경향신문>도 “아군의 용전”에 괴뢰군이 전 전선에서 패주 중이라며 국군이 해주시에 돌입했다고 했고, 6월28일치 <조선일보>는 “국군이 의정부를 탈환”했다고 썼다.
언론이 시민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마구 보내고 있을 때 이승만은 한강 다리 폭파를 준비했다. 6월28일 새벽 2시30분쯤 총참모장 채병덕 일행이 한강 인도교를 지난 직후 육군공병감 대령 최창식은 한강 다리 폭파를 명령했다. 시민들에게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고 해놓고 자기들만 빠져나간 뒤 다리를 끊어버린 것도 참으로 문제지만,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은 폭파 당시 한강 다리에 피난민이 가득 있었다는 점이다. 아비규환, 다리 위에 몇 명이 있었는지 알 수가 없고, 시신을 수습한 것도 아니니 도대체 몇 명이나 억울한 죽음을 당했는지 알 수가 없지만, 관련자들은 적게는 500명, 많게는 1500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대통령이 피난 갈 수는 있다. 꼭 스탈린처럼 모스크바 코앞까지 진출한 독일군의 포성 속에서 크레믈(크렘린) 궁전에 버티고 앉아 모스크바 방어전투를 지휘하는 게 능사가 아닐 수도 있다. 대통령이 피난 갈 때 백만이 넘는 서울 시민 모두와 피난 가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니 알리지 못하고 빠져나가는 궁색한 상황에 이를 수도 있다고 치자. 배수진을 치고 장렬하게 전사할 것이 아니라면 급하게 도망가며 다리도 끊을 수 있다고 치자. 그러나 다리를 끊을 때도 법도가 있고, 버려진 서울 시민들을 다시 만날 때도 예의가 있는 법이다. 짐승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1950년 6월27일치 <동아일보>와 <경향신문>, 28일치<조선일보> 1면. 한홍구 교수 제공 |
이승만 대통령(앞줄 맨 왼쪽)이 1952년 7월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방문해 반공 포로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대한민국정부기록사진집> |
한홍구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