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의 성찰/반성의 기회

세월호의 악마들, 대한민국의 악마들…

아진(서울) 2014. 5. 26. 11:07

세월호의 악마들, 대한민국의 악마들…

등록 : 2014.05.25 20:29 수정 : 2014.05.26 08:39

 

등짐을 진 피난민들이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폭파된 한강철교 옆에 임시로 놓인 부교 위를 건너고 있다. 피난민들은 소에 짐을 싣고 가다 식량이 떨어지면 잡아먹기도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사람이 중심이다]
세월호 참사 특별기고
한홍구 교수 역사와 책임 ①

세월호는 우리에게 준엄한 물음을 던진다. 책임이란 무엇인가? 역사 앞에서 책임을 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속옷 바람으로 도망치는 어처구니없는 선장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저 기막힌 모습을 우리는 역사의 굽이굽이에서 많이 보아왔다. 어쩌면 저 징글징글한 모습을 되풀이해서 또 보게 될는지도 모른다. ‘세월호의 악마’라 불린 선장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가 생생하게 동영상으로 되풀이해서 보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의 역사 속에 세월호의 악마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악마들은 너무도 많았다. 어찌 도올 선생 글에서 지적된 임진왜란 당시의 선조나 한국전쟁 때의 이승만뿐이랴.

세월호 사건이 있기 바로 전, 우리 사회는 태안 앞바다에서 해병대 캠프에 참가했던 고등학생 5명이 파도에 휩쓸려 숨지는 비극을 겪었고, 두 달 전에는 경주에서 리조트 체육관이 붕괴하여 대학생 10명이 숨지는 비극을 겪었다. 이런 사전 경고음에도 불구하고 세월호라는 사고가 또다시 터지니 참담하고 황망하기 짝이 없다. 서너 달 지나면 앞의 사고들이 그랬던 것처럼 세월호 사고도 잊혀져버리는 것일까? 세월호 사고가 경고음이 될까봐 불안하다. 세월호가 가라앉던 바로 그날, 핵마피아가 포함된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설계수명이 다한 핵발전소 고리 1호기의 재가동을 승인했다. 규제 완화?수명 연장-납품비리-마피아의 상호 묵인…. 예고된 인재의 모든 것이 그대로다. 21년 전 서해훼리호 사건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운 것일까? 사고가 터지면 그때만 이것저것 대책이 난무할 뿐, 사고는 또다시 망각의 함정에 빠진 우리를 덮쳐온다. 책임져야 할 사람들의 무책임, 끼리끼리 해먹는 ‘해피아’, 인명 경시, 안전 불감증…. 하나하나의 진단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진짜 문제는 이런 문제들이 서로 얽히고설켜 있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하다는 점이다. 혁명을 통해 단칼에 얽힌 매듭을 끊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고통스럽지만 찬찬히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들이 얽혀온 과정을 돌아보아야 한다. 세월호 사건 이후 많이 이야기된 것이지만 1950년 6월 북한군의 전면 공세 이후 대통령 이승만이 서울을 버리던 무렵으로 돌아가보자.

우리의 역사 속에 세월호의 악마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악마들은 너무도 많았다. 1950년 6월 북한군의 전면 공세 이후 대통령 이승만이 서울을 버리던 무렵으로 돌아가보자.

가만있으라 세월호에, 가만있으라 서울에

세월호 선장 이준석이 그랬던 것처럼 이승만은 북한의 공격으로 함락 위기에 빠진 수도 서울에서 제일 먼저 달아난 사람이었다. 전쟁이 발발하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던 호언과는 달리 국군은 속수무책이었다. 27일 새벽 1시에 소집된 비상국무회의에서는 서울시민의 피난에 대한 계획은 세우지 않고, 수원 천도를 결정했다. 새벽 3시, 국군통수권자 이승만은 경무대를 떠나 피난길에 올랐다. 이승만을 태운 특별열차는 수원에 멈추지 않았다. 새벽 5시 대전을 통과하여 오전 10시, 대구에 도착했다. 누군가가 “각하, 너무 많이 오셨습니다”라고 진언한 게 틀림없다. 평양이 아니라 대구에서 점심을 드신 이승만은 기차를 돌려 대전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날 저녁, 장거리 전화로 서울의 중앙방송국을 연결해 “유엔에서 우리를 도와 싸우기로 했으니 국민들은 안심하라”는 내용의 방송을 녹음했다. 케이비에스(KBS)는 이 방송을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할 때까지 내보냈다고 한다. 이승만은 방송에서 자신이 대전에 내려와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시민들은 그가 자신들과 함께 서울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라고 착각했다.

방송만이 아니었다. 신문도 잘못된 정보를 쏟아내고 있었다. 6월27일치 <동아일보>는 “국군정예 북상 총반격전 전개”라는 제목으로 국군이 해주시를 완전히 점령했다고 보도했고, 같은 날 <경향신문>도 “아군의 용전”에 괴뢰군이 전 전선에서 패주 중이라며 국군이 해주시에 돌입했다고 했고, 6월28일치 <조선일보>는 “국군이 의정부를 탈환”했다고 썼다.

언론이 시민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마구 보내고 있을 때 이승만은 한강 다리 폭파를 준비했다. 6월28일 새벽 2시30분쯤 총참모장 채병덕 일행이 한강 인도교를 지난 직후 육군공병감 대령 최창식은 한강 다리 폭파를 명령했다. 시민들에게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고 해놓고 자기들만 빠져나간 뒤 다리를 끊어버린 것도 참으로 문제지만,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은 폭파 당시 한강 다리에 피난민이 가득 있었다는 점이다. 아비규환, 다리 위에 몇 명이 있었는지 알 수가 없고, 시신을 수습한 것도 아니니 도대체 몇 명이나 억울한 죽음을 당했는지 알 수가 없지만, 관련자들은 적게는 500명, 많게는 1500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대통령이 피난 갈 수는 있다. 꼭 스탈린처럼 모스크바 코앞까지 진출한 독일군의 포성 속에서 크레믈(크렘린) 궁전에 버티고 앉아 모스크바 방어전투를 지휘하는 게 능사가 아닐 수도 있다. 대통령이 피난 갈 때 백만이 넘는 서울 시민 모두와 피난 가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니 알리지 못하고 빠져나가는 궁색한 상황에 이를 수도 있다고 치자. 배수진을 치고 장렬하게 전사할 것이 아니라면 급하게 도망가며 다리도 끊을 수 있다고 치자. 그러나 다리를 끊을 때도 법도가 있고, 버려진 서울 시민들을 다시 만날 때도 예의가 있는 법이다. 짐승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1950년 6월27일치 <동아일보>와 <경향신문>, 28일치<조선일보> 1면. 한홍구 교수 제공

최창식과 채병덕 - 이승만의 희생양들

9월15일 새벽 인천상륙작전이 이루어지고 서울 탈환이 임박하자 이승만 정부 안에서는 환도 후 어떻게 서울 시민과 대면하느냐는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승만 정권은 희생양을 찾았다. 다리 폭파의 현장 책임자였던 29살의 젊은 대령 최창식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된 바로 그날 임시수도 부산에서 열린 계엄고등군법회의는 최창식에게 국방경비법 27조의 ‘적전비행죄’를 적용하여 사형을 선고했다. 최창식은 자신은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항변했지만 소용없었다. 당시 판결문은 최창식의 한강 다리 폭파로 막대한 차량과 군인이 추락하고 무사한 차량 장비 및 군수물자가 적에게 노획되고 수만 병력이 도강을 하지 못하는 혼란이 발생했다고 모든 책임을 최창식에게 돌렸다. 9월21일 최창식은 부산 교외에서 사형되었다.

한강 다리 폭파와 관련된 또 다른 중요 인물인 육군 총참모장 채병덕도 최창식에 앞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채병덕은 전쟁 발발 직후인 6월30일 초기 패전의 책임을 지고 총참모장에서 해임되어 ‘경남 지구 편성군 사령관’으로 밀려났다. 채병덕은 7월24일 국방장관 신성모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그 내용은 귀하는 서울을 잃고 중대한 패전을 당하여 책임이 매우 무거운데, 지금 적이 전남에서 경남으로 향하고 있으니 이 적을 막기 위해 선두에 서서 독전하라는 것이었다. 바꿔 말하면 죽음으로 패전의 책임을 갚으라는 것이었다. 이 편지를 받은 사흘 뒤 채병덕은 ‘전사’했다고 발표되었다.

그의 죽음을 놓고 온갖 소문이 난무하지만 영미권에서 한국전쟁에 관한 고전적인 대중서인 페렌바크의 <이따위 전쟁>에 의하면 채병덕은 7월27일 하동고개에서 미군복을 입고 오는 한 무리의 군인들과 맞부딪쳤다고 한다. 채병덕이 “어느 부대냐?”고 외치자 그들은 채병덕을 향해 총탄을 퍼부었다. 채병덕의 부관은 덩치가 큰 채병덕의 시신을 간신히 끌고 와 차에 실었다. 채병덕의 뒤를 이어 총참모부장이 된 정일권의 회고록에 따르면 내무장관 조병옥은 “채병덕 장군이 애석하게 전사했어도 뒷이야기가 이러쿵저러쿵 많은 것”은 그가 적의 탱크가 미아리 문턱까지 왔는데 “걱정 말라 걱정 말라” 하다가 “수많은 서울 시민들을 지금 생지옥에 갇혀 있게 해”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한강 다리 현장의 공병감 최창식과 국방장관 신성모를 거쳐 이승만으로 이어지는 한강 다리 폭파의 명령 체계의 중간고리는 이렇게 진즉 끊어져 버렸다.

거룩할진저, 그 이름은 ‘남하’한 애국자로다

서울 시민을 속이고 다리 끊고 도망간 이승만은 서울에 돌아올 때 서울 시민들에게 머리 숙여 사과했을까? 세월호 사건 후 박근혜 대통령은 비록 옆구리 찔러 절 받기였지만 유가족과 시민들의 거센 분노에 못 이겨 몇 차례 사과를 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리 끊고 도망친 직후 이승만을 따라온 신익희, 장택상, 조봉암 등 국회의장단은 충남 도지사 관저에 머물고 있는 이승만을 찾아가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팔을 벌리는 제스처를 써가며 “내가 당 덕종이야?”라며 한마디로 사과를 거부했다고 한다. 당 덕종은 반란을 진압한 뒤 백성들이 난에 휩쓸린 것은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고 사과한 바 있다. 이승만을 대신해서 사과한 것은 전쟁 발발 이후 각종 방송에 대한 책임을 맡은 국방부 정훈국장 이선근이었다. 다리 끊고 거짓 방송 하고 도망친 일이 어디 일개 국장의 사과로 끝날 일인가.

강을 건너 도망쳤다 돌아온 ‘도강파’가 서울에 남아야 했던 ‘잔류파’에게 돌려준 것은 사과도 위로도 아닌 “정실과 관용과 누락이 절대 있을 수 없다”는 서슬 푸른 ‘부역자 처벌’이었다. 그러나 인천 상륙에서 서울 탈환까지 거의 2주가 걸렸는데 엄중 처벌을 받아야 할 부역자들이 여전히 서울에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진짜 부역자라고 불릴 만한 자들은 후퇴하는 인민군을 따라 북으로 올라갔고, 남아 있는 사람들이라고 해봐야 총 든 자들이 와서 짐 나르라니 짐 나르고 집회 나와 만세 부르라니 만세 부른 그런 사람들이었다. 전쟁 당시 서울에 남았던 서울대학교 사학과 교수 김성칠은 일기에서 “악질들은 제 한 깐이 있으니까 미리 다 도망”해버리고 “나는 악질로 굴지 않았으니 나쯤이야” 하고 마음 놓고 있던 사람들만 잡혀가서 경을 쳤다고 썼다.

부역자 처벌은 일부 극우세력에게는 엄청난 재산 축적의 기회이기도 했다. 오죽했으면 서울 수복 3주가 안 되어 계엄사령관이나 헌병사령관이 부역자 처벌을 빙자하여 살인과 고문을 자행하고 재산을 약탈하고 부녀자들을 겁탈하는 악질 도배들을 철저히 소탕하겠다는 담화를 발표했을까. “허무맹랑한 사실로써 선량한 시민을 악질 부역자로 날조하여 이를 처단케 함으로써 그들의 가산 기타 금품을 탈취하려는 부류”가 아주 많았기 때문이다. 정부는 이를 ‘일부 청년단체’의 간부와 성원들의 일탈로 몰고 가려 했지만, 못된 짓을 한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외신들은 이와 같은 만행이 경찰과 군에 의해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연일 보도했다.

…너무 멀리 도망간 각하

김성칠은 일기에서 이렇게 썼다. “어리석고도 멍청한 많은 시민(서울 시민의 99% 이상)은 정부의 말만 듣고 직장을 혹은 가정을 ‘사수’하다 갑자기 적군을 맞이하여 90일 동안 굶주리고 천대받고 밤낮없이 생명의 위협에 떨다가 천행으로 목숨을 부지하여 눈물과 감격으로 국군과 유엔(UN)군의 서울 입성을 맞이하니 뜻밖에 많은 ‘남하’한 애국자들의 호령이 추상같아서 ‘정부를 따라 남하한 우리들만이 애국자이고 함몰 지구에 그대로 남아 있은 너희들은 모두가 불순분자이다’ 하여 곤박이 자심하니 고금천하에 이런 억울한 노릇이 또 있을 것인가!” 김성칠은 그날의 일기를 “거룩할진저, 그 이름은 ‘남하’한 애국자로다”라는 탄식으로 마무리했다. 이것은 적반하장의 극치였다. 다리 끊고 도망갔던 자들이 돌아와 남은 사람들을 빨갱이라고 윽박지르는 것이 어찌 이념의 문제겠는가. 그것은 싸가지 문제였을 뿐이다.

전향자들의 단체인 보도연맹을 관리했던 대표적인 공안검사 정희택 역시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숨어 있어야 했다. 그는 인민군에게 잡히면 살아남을 수 없는 처지였기에 땅굴을 파고 권총을 몸에 지닌 채 77일을 쪼그려 있었다고 한다. 간신히 살아남은 그는 정부가 환도하자 지팡이를 짚고 법무장관 이우익에게 인사를 갔다. 장관이 살아 돌아온 정희택을 보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이제부터 잔류파에 대해서는 부역 여하를 막론하고 수사해서 재판에 회부한다”는 것이었다. 정희택은 분노를 참을 수 없어 지팡이로 장관의 책상을 내리치며 “수도를 사수하겠다고 거짓말을 하고 애국시민을 유기한 채 도망간 자는 누구인가. 당신들이야말로 한강의 남쪽 강가에서 잔류 시민들에게 사과하고 허가를 얻은 후에 들어왔어야 했다”고 외쳤다고 한다. 이승만의 거짓 녹음방송에 앞서 서울 사수를 호소하는 즉흥시를 생방송으로 내보냈던 모윤숙도 피난을 가지 못했다. 모윤숙은 9월30일 경무대에 가서 이승만을 만나자 분한 생각이 가슴에 북받쳐 넥타이를 붙잡고 대롱대롱 매달리다시피 하며 “할아버지, 도대체 나를 부려먹고 막판에는 방송을 시키고 혼자만 살려고 피난 가기예요?” 하고 바락바락 악을 썼다고 한다. 이렇게 대통령 넥타이에 매달리고 장관 책상을 지팡이로 후려치기라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당대 최고의 우익 인사였기 때문이다. 이도저도 아닌 사람에게는 가혹한 처벌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앞줄 맨 왼쪽)이 1952년 7월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방문해 반공 포로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대한민국정부기록사진집>

서울 시민을 속이고 다리 끊고 도망간 이승만은 서울에 돌아올 때 서울 시민들에게 머리 숙여 사과했을까? 이승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강을 건너 도망쳤다 돌아온 ‘도강파’가 서울에 남아야 했던 ‘잔류파’에게 돌려준 것은 사과도 위로도 아닌 서슬 푸른 ‘부역자 처벌’이었다.

앞줄 사형, 뒷줄 무기

다리 끊고 도망갔다 기세등등하게 돌아온 자들에게 도대체 몇 명이나 목숨을 잃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법무부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정부 수립 이후 마지막 사형이 집행된 1997년까지 사형당한 사람은 군 관련 사건 120명을 포함하여 모두 919명이라고 되어 있다. 아마도 대한민국 정부가 제시하는 통계 중에서 가장 엉터리 통계일 것이다. 이 자료에서 한국전쟁 이전과 전쟁 기간 중의 통계는 전혀 믿을 것이 못 된다. 부역자 처벌 과정에서는 9·28 서울 수복에서 1·4 후퇴 사이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1950년 11월25일 동아일보 기사에 사형이 선고된 부역자가 867명이고 이 중 이미 사형이 집행된 사람은 161명에 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부산일보> 1950년 11월27일치에는 11월24일에 322명의 공산당 협력자에 대한 형 집행이 있었다고 되어 있다. 1950년 12월11일 주한미국대사관의 ‘한국 정부의 부역자 처리에 관한 보고’에 따르면 11월8일까지 합동수사본부에 체포된 1만7721명 중 민간법정에서 사형이 선고된 사람은 353명, 계엄군법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된 사람은 713명, 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이 선고된 사람은 232명이었다. 오죽했으면 “앞줄 사형, 뒷줄 무기”라는 말까지 나왔을까.

한국군의 ‘잔인하고 범죄적’인 처형 장면을 보다 못한 영국군이 사형 집행을 중단시키는 등 이승만 정권의 무자비한 사형 집행은 외교문제로도 비화되었다. 박완서가 탄식했듯이 “친일파의 정상은 그렇게도 잘 참작해 주던, 그야말로 성은이 하해와도 같은 정부가 부역에는 그다지도 지엄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일제가 가혹했다지만, 일제 36년간 사형당한 독립운동가 수는 3개월 인민군 점령 기간에 부역했다는 명목으로 목숨을 잃은 시민 수에 한참 못 미친다. <한국경찰사> 제2권에 따르면, 인민군 치하 3개월간에 걸친 부역자 중 검거 15만3825명, 자수 39만7090명으로, 총 55만915명의 부역자가 처리되었다. 이들과 그 가족들은 두고두고 연좌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양심 없는 자들은 한몫 볼 수 있는 기회로 여기고 부역자 처벌에 열을 올렸지만, 최소한의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서울지방법원 판사로서 부역자 처벌 재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유병진은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뒤 간행한 <재판관의 고민>이라는 저서에서 부역자 재판의 문제점을 생생하게 지적했다. 조금 길지만 유병진의 고민을 들어보자. “우리는 서울시민에 대하여 왜 서울에서 후퇴하지 않았던가하고 이를 문책하여야 할 것인가? …… 평시민은 고사하고 또 중간파 거두를 내놓고라도 정부 장차관급의 몇 사람과 도지사까지, 아니 그 이상의 우익 요원들의 대부분이 탈출 못하지 않았던가! …… 그러면 탈출의 기회조차 주지 않았던 자는 그 누구였던고! …… 일단 진격의 명령만 내리면 1주일 이내 압록강까지, 아니 백두산에 태극기를 휘날린다던 군부의 호언을 믿고만 있었던 시민에게 27일 밤의 대통령 특별방송은 일층 진실로 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그러고 본다면 서울시민의 잔류는 정부에서 시킨 셈인가? 결론이 이에 이르니 딱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부녀자들이 끌려오는 경우가 자꾸 늘어났다. 그 죄목은 여성동맹 간부로 “인민군에 제공하기 위하여 된장 고추장 혹은 놋그릇 등을 수집하여 제공하였다는 것”이다. 일제 말기에 일본이 전쟁물자가 부족해지자 가가호호를 수색하여 놋그릇을 걷어 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일제와 싸웠던 미군이 한반도 남쪽을 점령한 뒤 일제에게 놋그릇을 바쳤다거나 일본 군대에 나갔다고 처벌한 적은 없었다. 인민군도 남쪽을 점령한 뒤 이승만 정권에 세금 바쳤다고 사람들을 못살게 굴지는 않았다. 참으로 감당하기 힘든 나날이었다.

얼마 전 한국방송(KBS)에서 ‘한국의 유산’이란 공익광고에서 대한의 잔다르크로 불리면서, “독립투사들의 주린 배를 채워준 임시정부의 영원한 안식처, 그 어머니를 기억합니다”라고 소개되었던 정정화도 부역죄 처벌을 피해가진 못했다. 과거 임시정부 시절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 북에 갔다가 전쟁 때 내려온 것을 만난 죄였다. 독립운동 시절 잡혀간 적 있었던 종로경찰서에 정정화는 해방되었다는 조국에서 다시 잡혀갔다.

‘안의사’의 후예들

임시정부의 어머니를 비롯한 수많은 부역자들의 처벌에 앞장선 사람은 과연 누구였을까? 그것은 냉전과 분단의 틈바구니에서 친일파 민족반역자에서 애국적 반공투사로 화려하게 변신한 김창룡, 원용덕, 노덕술 같은 자들이었다. 관동군 헌병 보조 출신에서 이승만 시절의 특무부대장(보안사령관)으로 출세한 김창룡은 여순사건 직후의 숙군사업에서 남로당 프락치로 적발된 박정희를 수사했던 장본인이지만, 같은 만주 출신이란 이유로 원용덕, 백선엽, 정일권 등과 함께 박정희를 살려준 자이기도 하다. 서울 수복 후 군검경 합동 수사본부 본부장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 김창룡은 이승만의 최측근으로 수많은 공안사건을 조작했다. 김창룡의 손을 거친 공안사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백범 김구 선생의 암살 사건이다. 안두희에 따르면 김창룡은 자신이 백범을 암살하자 자신에게 “안 의사, 수고했소”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이들의 세계에서 ‘안 의사’란 안중근 의사가 아니라 백범 살해범 안두희였다. 김창룡이 박정희와 앞뒤로 서서 찍은 사진이나, 김창룡이 백선엽, 이후락 등과 어깨동무하고 찍은 사진은 한국 공안권력의 뿌리가 어떤 것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950년대 후반 공안조작사건의 대표적인 희생자는 조봉암이었다.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농림장관으로 농지개혁을 주도하고 1952년과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두 번 연속 2위를 차지한 거물 정치인 조봉암은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을 가장 위협할 인물로 꼽히고 있었다. 조봉암이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던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내건 구호는 ‘평화통일’과 ‘피해대중을 위한 정치’였다. 피해대중이 누구이겠는가. 바로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이며, 억울하게 부역자로 처벌받은 사람들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조봉암에게 간첩이라는 터무니없는 누명을 뒤집어씌워 그를 죽인 뒤 편안하게 1960년 대통령 선거를 치르려 하였다. 그러나 1958년 7월2일 서울지방법원에서 열린 진보당 사건 1심 선고공판에서 사형을 구형받은 조봉암은 예상을 깨고 간첩죄 부분은 무죄이고 국가보안법 위반만을 유죄로 인정하여 징역 5년 형을 선고받았다. 재판장은 유병진, 부역자 처벌의 부당성을 깊이 고민했던 바로 그 판사였다.

한홍구 교수
공안권력과 마피아들

7월5일 법원에는 반공청년을 자처하는 300여명이 들이닥쳐 “빨갱이 판사 유병진을 타도하자”, “죽여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난동을 부렸다. 이 반공청년들도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일제가 키운 군국소년들이었다. 정작 일본에서는 패전 후 미군이 군국소년들의 머릿속에서 군국주의 물을 빼는 작업을 벌였지만, 분단된 한국에서 미군은 그런 제스처를 취하지 않았다. 전쟁이 터지자 군국소년들은 군인이 되어 전쟁을 치렀고, 전쟁이 끝난 뒤 반공청년이 되어 “빨갱이 판사를 타도하라”며 법원에 난입했다. 박정희 시절, 이들은 향토예비군이 되어 “일하며 싸우고 싸우며 일하세”, “싸우면서 건설하자” 등을 외치며 병영국가 건설과 유신과업 수행에 앞장섰다. 그들은 편안한 노년을 보낼 수 없었다. 김대중 빨갱이, 노무현 빨갱이가 대통령이 된 나라에서 ‘가스통 할배’, ‘애국 할배’가 된 1950년대 반공청년 세대는 요즘도 피디(PD)수첩 무죄, 미네르바 무죄, 강기갑 무죄, 한명숙 무죄 같은 판결을 쏟아내는 법원을 찾아가 “빨갱이 판사 타도하자”를 외치며 팔십 청춘을 불태우고 있다. <다음 회에 계속>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