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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문제인가, 한국야구의 문제인가

아진(서울) 2011. 8. 19. 13:20

[프로야구 SK 김성근 감독 시즌 중 경질 파문] 12번째 경질당한 '野神(야구의 신)'… 그의 문제인가, 한국야구의 문제인가

SK, 이만수 감독대행 체제…金감독 "시즌후 사퇴" 발언에 구단측 하루만에 "해고" 통보

야신(野神)의 퇴장은 쓸쓸했다.

재임 4년 동안 SK를 우승 3회, 준우승 1회로 이끈 김성근 (69) 감독이 '올 시즌 후 사퇴' 의사를 밝힌 지 하루 만에 전격 해임됐다. SK 구단은 "김 감독이 사퇴 의사를 밝힌 상태에서 남은 시즌이 파행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고 해고 이유를 밝히며 이만수 2군 감독을 감독 대행으로 불러들였다.

김 감독은 1984년 OB 베어스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18시즌 동안 6개 팀을 지휘했다. 그는 해고 소식에 "지금까지 열두 번 잘렸다"며 허탈하게 웃는 것으로 소감을 대신했다. 뛰어난 선수 조련과 전술로 '야구의 신(神)'이라 불리던 그가 왜 불명예 퇴진을 당할까.

타협과 변명을 몰랐던 승부사

승리를 위해 감독이 팀 운영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야구 철학을 지닌 김성근 감독과 구단의 갈등은 한국 문화에서 불가피한 것일지도 모른다. 프런트가 지원하는 역할에 충실한 일본과는 달리 한국은 프런트의 힘이 강하다. 모기업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다. 이런 풍토에서 감독은 자기 야구 스타일을 완성하기 어렵다. '파리 목숨'이나 다름없는 감독은 성적이 기대에 못 미치거나 구단과 갈등을 빚으면 서슬 퍼런 해고의 칼날을 피할 수 없다. 김 감독은 1988년 OB, 1990년 태평양, 1999년 쌍방울에서 운영방식에서 구단과 의견차이를 보이며 그만뒀다. 2002년엔 LG를 한국시리즈에 끌어올리고도 구단이 추구하는 '신바람 야구'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경질됐다. 김 감독은 SK에서도 우승이란 지상 목표 아래 선수단 전력을 최우선 순위로 두고 매년 전력투구를 해왔다. 하지만 트레이드나 FA(자유계약선수) 영입 문제 등을 놓고 생각이 다른 구단에 대해 종종 불편한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야구는 죽기 아니면 살기"

김성근 감독의 인생 모토는 '일구이무(一球二無)'다. 두 번째 기회는 생각하지 말고, 오로지 지금 이 순간에 모든 것을 걸라는 뜻이다. 재일교포인 김 감독은 일본 에서 우유와 신문배달로 학비를 보태며 야구를 했다. "고3 때 아르바이트한 돈으로 처음 새 옷을 입어봤다"고 했다. 어머니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비행기에 몸을 실은 그는 김포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기내에서 눈물을 흘리며 "반드시 성공하겠다"고 결심했다.

김 감독은 "초심을 잃을까 봐 타협과 변명이라는 말을 금기(禁忌)로 삼았고, 일부러 세상과 어느 정도 거리를 갖고 살았다"고 했다. 그에게 야구는 '죽기 아니면 살기'였다. 쌍방울 시절 신장암 진단을 받고도 경기장에 나서는 투혼을 보였다. 이기기 위해서라면 냄새 나는 속옷도 갈아입지 않았고, 수염도 기르길 마다하지 않았다. 그에게 징크스는 승리를 위한 집념의 상징이었다.

"당분간 푹 쉬고 싶다"

승리를 최우선으로 삼는 그의 야구에 대해 팬들은 물론이고 상대팀 감독들도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의 지도를 거친 선수들은 달랐다. KIA 최태원 코치는 "야구가 단지 던지고 때리는 경기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준 사람이 김성근 감독님"이라고 했다. 일부 야구인들은 그를 '승리를 위해 선수를 혹사하는 냉혈한(冷血漢)'이라고 했지만, 정작 그 당사자는 "평범하게 끝날 뻔한 내 야구 인생의 꽃을 피워주신 스승님"이라고 고마워했다. 각 팀에 속한 그의 제자들은 그가 2002년 LG 사령탑에서 물러나자 직접 환갑잔치를 마련해 감사를 표시하기도 했다.

김성근 감독은 "그동안 힘써준 코치들과 술 한잔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푹 쉬고 돌아오겠다"고 했다. 김 감독과 팀을 끌어온 SK 1·2군 코치 6명은 그의 경질소식에 곧바로 사퇴의사를 밝혔다.


[천자토론] 12번째 경질당한 '野神(야구의 신)'… 그의 문제인가, 한국야구의 문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