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스포츠머신
김응룡 회고록[2] ‘숨은 세력은 해태의 패배를 원했다’
[박동희의 Mr.베이스볼] 김응룡 회고록[2] ‘숨은 세력은 해태의 패배를 원했다’
![]() 1983년 한국시리즈에서 MBC를 꺾은 해태 선수들이 김응룡 감독의 헹가래를 치고 있다(사진=KBO) |
‘야신’, ‘야왕’, ‘야통’. 이상은 프로야구 감독의 별명들이다. 하지만, 이런 별명 없이도 한국시리즈 우승 10회와 통산 1천476승을 거둔 감독이 있다. 김응룡 전 해태·삼성 감독이다.
1983년 해태 감독으로 지휘봉을 잡은 이후 김 전 감독은 2004년 삼성 유니폼을 입고 은퇴할 때까지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명장으로 꼽혔다. 그러나 그는 젊은 시절부터 불렸던 ‘코끼리’란 별명에 만족할 뿐 그 이상의 찬사를 원하지 않았다.
지난해 삼성 사장에서 물러난 이후 제주도와 서울을 오가는 김 전 감독은 자신의 60년 야구인생을 “바람”으로 비유했다. 인생의 단맛을 느끼게 하는 선선한 바람이 불다가도 어느 순간엔 살점을 뗄 만큼 강력한 폭풍이 불어 사는 게 그리 쉽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무엇보다 인생의 그 모든 영원할 것 같던 현장이 결국 바람처럼 한순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아쉬움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감귤내음이 진하게 배인 제주에서 김 전 감독을 만났다. 현역시절 냉혹한 승부사로 명성을 떨쳤던 김 전 감독은 제주에선 웃음 많고, 해맑은 70살 야구소년이었다. 인터뷰는 장시간 진행됐다. 김 전 감독은 “고문을 받는 기분”이라면서도 60년 야구인생의 뒷이야기를 모두 털어놨다. [박동희의 Mr.베이스볼] 김응룡 회고록은 3회에 걸쳐 연재된다.
“1982년 해태 창단 멤버가 15명이었어요. 정상적인 프로야구팀으로 보기 어려웠지요. 그래도 해태 초대 감독이었던 김동엽 감독님은 늘 “야, 잘 들으라우. 이제부터 우리는 일당백이야. 알갔어? 일당백이야. 일당백!”하고 외치셨어요(웃음). 오죽했으면 타자로 입단한 제가 1982년 10승 투수가 됐겠습니까. 타자로도 타율 3할5리, 13홈런, 69타점으로 타점왕도 했어요. 3할에 타점왕에 10승에 평균자책 2점대까지 기록했으니 이 정도면 기네스북에 이름이 올라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 전 해태 타자 김성한 -
해태의 주포였던 김성한(사진=KBO) |
1983년 10월 코치 2명, 선수 15명으로 구성된 해태 타이거즈의 제2대 감독으로 취임하셨습니다. 선수는 모자라도 팀원들의 이름값만 보자면 무척 화려했다는 생각입니다.
내가 국가대표 감독할 때 다 밑에 있던 선수들이었지. 선수들 특징들이야 다 꿰차고 있었다고. 하지만, 선수가 모자라면 제아무리 명장이라도 우승은 힘들어.
어떻게 선수 부족난을 극복하셨습니까.
생각해보라고. 선수가 없다 쳐. 어떻게 하겠어?
기존 선수들의 포지션을 재조정하거나 외부에서 선수를 영입해야 하지 않을까요.
(고개를 끄덕이며) 그거야. 있는 선수들을 활용하거나 외부 수혈밖엔 방법이 없어. 감독 첫해 있는 선수들을 상대로 포지션 이동을 많이 시켰어. 1983년부터 3루수였던 김종모를 외야로 보낸 게 시작이었지.
1982시즌이 끝나고서 삼성 서정환(전 KIA 감독)을 1천600만 원에 현금 트레이드해왔습니다. 해태 외부 수혈의 시작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요. 지금도 서정환의 현금 트레이드는 한국 프로야구 사상 1호 트레이드이자 가장 성공한 트레이드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자세를 고쳐 앉으며) 사실 말이야. 내가 데려오려고 데려온 게 아니라 서영무(작고) 당시 삼성 감독이 ‘데려가라’고 부탁한 거였어. 그때 삼성에 좋은 내야수감이 좀 많았어? 오대석, 배대웅, 천보성 이런 대표팀 출신 내야수들이 다 뛰고 있었잖아. 서정환 자리가 없었지. 데려와서 요긴하게 잘 썼지. 선수도 열심히 해줬고.
감독 취임하시고, 선수 수급차원에서 재일교포 선수 2명을 영입했습니다. 언더핸드 투수 주동식과 포수 김무종이었습니다. 두 선수의 합류가 그해 해태에 큰 힘이 되지 않았나 싶은데요.
그땐 정말 해태에 선수가 없었어. 특히나 투수, 포수가 부족했다고. 한참 고민을 하는데, 재일교포 중에 일본에서 뛰던 언더핸드 투수가 있다는 거야. 경력을 보니까 한국 오면 좀 할 것 같아. 그래서 주동식을 뽑았지. 김무종도 비슷해. 방망이도 좀 치고 수비능력도 괜찮은 재일교포 포수가 있다고 하기에 뽑은 거야. 결과적으로 재미 좀 봤지(웃음).
코치는 군산상고 감독이었던 백기성 씨가 합류하면서 3명이 됐습니다.
백기성이 한일은행 때 내 후배였다고. 능력도 있고 해서 데려왔지. 그래도 코치가 모자랐어. 야구에선 코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하거든. 하지만, 그렇다고 구단에서 신경을 써주나. 그때부터 노장들을 줄줄이 은퇴시켜서 코치로 쓴 거야. (김)봉연이가 부진하면 “넌 인마 이제 틀렸어. 내일부터 코치!”, 김종모가 부진하다 싶으면 또 “종모, 너도 인마 이제 틀렸어. 내일부터 코치!”이랬다고. (좌중이 웃자) 웃기지?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코치를 충원할 수가 없었어.
![]() 해태 야구는 화려하면서도 품위가 있었고, 거칠면서도 정교했다. 지금껏 해태 야구를 기억하는 이들이 많은 건 그런 야구를 다시 보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사진=KBO) |
지금 돌아봐도 1983년 해태 타선은 1번부터 7번까지 죄다 김 씨였습니다. 1번 김일권, 2번 김일환, 3번 김성한, 4번 김봉연, 5번 김종모, 6번 김무종, 7번 김종윤, 8번 서정환, 9번 차영화 순이었습니다.
타자들만 만날 김 씨였는 줄 알아. 타순도 일 년 열두 달 그대로였어.
타순 변화가 없는 건 감독님만의 특징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요. 어째서 한번 짜놓은 타순을 시즌 끝까지 밀고 가신 겁니까.
잘 들어봐. 난 말이야. 시즌 초에 한번 타순을 짜면 말이지. 특별히 부상선수만 없으면 그걸 계속 밀고 나갔어. 코치가 감독실에 찾아와서 “감독님 오늘 오더를 어떻게 짤까요” 물으면 “뭘 어떻게 짜. 하던 대로 하지”하고 대답했다고. 조금 방망이가 안 맞는다고 타순을 자꾸 바꾸면 타자에게 악영향을 준다고. 부담도 가중되고, 낯선 타순에 배치되면 안정감도 떨어져. 그런데도 왜 감독들이 타순을 자꾸 바꾸는 줄 알아?
타자들이 불안해 보이기 때문일까요?
천만에. 감독 자신이 불안하니까 자꾸 타순을 바꾸는 거야. 감독이 확신이 있으면 바꿀 필요가 없지. 하지만, 나도 예외가 있긴 했어.
예외요?
그럼. 간혹 가다 파격적인 타순을 선보이곤 했어. 한번은 양승호(롯데 감독)한테 “오늘부터 니가 4번 타자다”라고 했다고. 양승호가 속으로 ‘오늘 감독이서 기분 나쁜 일이 있나’했을 거야. 실제로 자기 딴엔 ‘오늘 하루만 4번을 시키겠지.’ 생각했다는 거야. 그런데 내가 걔를 4번 타자로 얼마나 썼는지 알아?
일주일이요?
양승호가 그러더라고. “저를 두 달 동안 4번 타자로 기용하셨습니다”라고 말이지. 난 한 달 정도 시킨 것 같은데(웃음).
그렇게 하신 이유라도 있습니까.
일종의 자극이었지. 양승호가 4번 치면 기존 중심타자들이 뭔가를 느끼지 않겠어. 프로는 백날 말로 해봤자 발전이 없어. 생존을 피부로 느껴야지. 그때부터 자세가 변화한다고.
해태 선수들의 개성이 워낙 강해 다루기가 어려우셨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면서) 아니야. 해태 선수들은 다 단순한 애들이었어. 그러니까 오히려 다루기가 쉬웠지(웃음).
'기적'으로 불렸던 해태의 1983년 한국시리즈 우승 1983년 한국시리즈 우승은 해태 전설의 시작이었다(사진=KBO)
“해태 연봉이 짜기도 했지만, 선수 대우가 좋지 못했어요. 1983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했는데도, 전체적인 주전선수들의 연봉은 한국시리즈 문턱도 밟지 못한 팀보다 적었습니다. 선수들은 팀 사정을 잘 이해해주고 참는데, 구단은 왜 선수단에 이처럼 무심한지 알 수가 없었어요. 그래 1984년 개막전을 치르고 전체 회식을 할 때 제가 앞장서서 ”불판의 고기에 손을 대지 말자”고 했습니다. 박건배 해태그룹 회장이자 구단주님 앞에서 우리의 뜻을 무언의 시위로 전달하고 싶었던 거죠.”
- 전 해태 타자 김일권 -
1983시즌 전만 해도 해태를 우승후보로 꼽는 야구전문가는 거의 없었습니다. ‘잘해야 3위’라는 평이 지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해태는 그해 전기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한국시리즈에 직행했습니다.
선수는 부족했어도 선수질은 참 좋았어. 갖출 건 다 갖췄지. 일단 발 빠른 1번 타자 김일권이 있었고, 타율 좋은 김종모도 있었다고. 여기에 김봉연, 김성한, 김준환 같은 장타자도 몇 명 있었어. 감독이 타순을 짜기엔 안성맞춤이었지.
1983년에는 투수진도 꽤 좋았습니다. 에이스 이상윤과 김용남, 주동식, 강만식은 어느 팀에 내놔도 모자람이 없는 A급 투수들이었습니다.
이상윤이 공이 정말 좋았지. 그해 20승을 기록했잖아. 주동식은…(잠시 생각하다가) 사실 재일교포 선수들은 잘 이해를 못 했을 거야. 내가 후기리그 때 주동식을 잘 등판시키지 않았다고. 전기리그 우승했으니까 한국시리즈 대비하려면 오버페이스를 할 필요가 없었거든. 그런데 주동식은 그게 불만이었던 거야. 옵션을 다 채우려면 등판을 해야 하는데, 감독이 안 내보내 주니까 말이지. 지금도 날 미워하고 있을지 몰라(웃음).
2년 전 주동식 씨를 뵙는데 감독님 이야기하면서 많이 웃었습니다. 오히려 “감독님께 지금도 고마운 마음”이라고 하더군요.
그래? 그러면 다행이고. 지나 내나 나이 들어가는데 미워하면 뭐할 거야. 안 그래?(웃음).
전기리그 우승은 그해 6월 7일부터 9일까지 열린 광주 삼미 3연전에서 모두 승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사실 그 3연전 전까지 해태는 삼미에 2.5경기 차로 뒤지고 있었습니다.
전기리그 내내 삼미랑 치고받고 싸웠잖아. 삼미에 근마가 물건이었지.
장명부요?
그래, 장명부. (혀를 차며) 이야, 근마 진짜 능구렁이야. 삼미가 우리보다 꽤 앞섰다고. 광주에서 삼미와 3연전을 하는데 장명부가 다 등판할 태세야. 첫날은 장명부가 잘 던지고 있었어. 아, 그런데 갑자기 얼굴을 감싸더라고. 관중석에서 누가 새총으로 10원짜리 동전을 쐈는데 자기가 맞았다는 거야. 그런데 생각해보라고. 새총으로 어떻게 마운드 위에 있는 투수를 맞추겠어. 되레 머리 굴렸다가 그날 엄청 두들겨 맞고 강판당했지. 셋째 날에도 선발로 나왔는데 이번엔 경기 초반에 작살나고 감독이 투수교체 사인도 안 보냈는데 자기가 알아서 벤치로 들어갔어(웃음). 그 3연전에서 삼미가 우리한테 3연패 하는 바람에 해태가 전반기 1위를 차지할 수 있었지. ‘적의 고통은 우리의 기쁨이다’ 몰라?(웃음).
1983년 한국시리즈에서 후기리그 우승팀 MBC 청룡과 만났습니다. 공교롭게도 MBC 사령탑은 해태 초대 감독이었던 김동엽 감독이었습니다.
김동엽 씨랑은 실업 때도 자주 붙었어. 내가 한일은행 감독할 때 그 양반이 공군, 아마 롯데 감독이었거든. 뭐, 서로 잘 알았지.
전기리그가 끝나고 4번 타자 김봉연이 교통사고로 크게 다치면서 “해태의 우승은 힘들 것”이란 예상도 많았습니다. 감독님께서도 눈앞이 깜깜하셨을 듯합니다.
깜깜? (손을 흔들며) 그런 거 없었어. 난 이후 한국시리즈 때도 누가 부상당하면 걱정하지 않았어. 오히려 말이지. 선수들한테 “잘 됐다. 주변에서 매일 해태는 선동열, 김봉연, 김성한이 있어서 우승했다는 소릴 하는데, 지금 게네들이 없을 때 우승하면 너네들이 잘해서 우승했다는 소릴 들을 수 있다.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마라”고 이야기했다고.
![]() 1983년 해태 우승을 맞춰 일약 전국구 스타가 됐던 하일성 KBS N 스포츠 해설위원(사진=줌인스포츠 강명호 기자) |
팽팽한 접전이 펼쳐질 것이란 예상과 달리 해태가 MBC에 4승1무를 거두며 대망의 한국시리즈 우승컵을 차지합니다.
거의 일방적인 시리즈였지. 그래서 별로 기억나는 일화도 없어. (문득 생각난 듯) 사실 말이야. 해태 우승의 최대 수혜자가 누군지 알아?
글쎄요. 해태 선수단 아니겠습니까.
하일성이야, 하일성. 그 친구 유명해진 이유가 야구해설가 중에서 유일하게 자기 혼자 해태 우승을 맞췄거든. 그때 해태는 전혀 우승할 전력이 아니라고들 했다고. 그래 내가 한번은 물었지. “야, 넌 왜 해태를 (우승팀으로) 찍었냐?”
뭐라고 하던가요.
(입을 가리고 웃으며) “아니 내가 뭘 압니까. 그냥 형님 보고 찍었지”그러는 거야. 1983년 해태가 우승하고 나서 하일성이 광주구장에 중계하러 오면 관중이 “하일성!, 하일성!”하고 연호를 했어. 그럼 해태 우승의 최대 피해자는 누구였을 것 같아?
해태 우승을 예상하지 못한 야구해설가들 아니었겠습니까.
그렇지. 이호헌 씨라고 해설하던 양반이 있었거든. 그 양반 고향이 경상남도 마산이야. 그러니까 경상도 사투리를 쓸 거 아니야. 그 양반이 나한테 하루는 하소연하는 거야. “해태 팬들이 귀신같이 내 차를 알고 광주만 내려오면 못으로 긁는다”고 말이지(웃음). 그땐 다들 순진한 시절이었어.
해태가 한국시리즈에 강할 수밖에 없던 이유와 '불고기 화형식'의 내막 1983년 한국시리즈 우승 뒤, 축하연에서 박건배 해태그룹 회장(사진 맨 오른쪽)의 머리에 샴페인을 뿌리고 있는 김일권. 두 이는 이듬해 '불고기 화형식'으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사진=KBO)
해태는 해태만의 물가가 있었어요. 다른 팀 선수들이 연봉으로 얼마를 받는가는 신경도 안 썼어요. 그때는 가뜩이나 연봉상한선 25%가 있어서 아무리 전해 홈런을 100개 쳐도 다음해 연봉은 기존 연봉에서 25%밖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죽으라는 소리밖에 더 되겠어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돈을 벌려면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는 수밖에. 정말 한국시리즈만 되면 죽기살기로 플레이한 거 같아요. ‘헝그리 정신’ 맞아요. 해태 정신이 바로 그거였어요.”
- 전 해태 타자 김봉연 -
1983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습니다만, 다음 해는 우승 문턱에도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팀 평균자책은 3.16으로 2위였는데 반해 팀 타율이 2할4푼8리로 5위에 그친 게 악재로 작용했습니다. 하지만, 연봉 때문에 선수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던 게 더 큰 악재였다고 하더군요.
해태가 짜긴 짰어. 해마다 4월 한 달 동안은 선수들 입이 전부 튀어나와있어. 10승한 투수가 다른 팀 1승한 투수보다 연봉이 적었으니까. 사실 해태가 한국시리즈에서 잘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어. 돈 많이 받는 길은 한국시리즈 올라가서 우승하는 것밖엔 없었거든. 물론 우승 보너스도 많이 안 나왔어.
해태만 유일하게 ‘승리 매리트 제도’가 없었던 것으로 압니다.
여담인데 말이지. 해태 구단 고위층이 주로 하는 일이 뭔지 알아? 어느 팀이 매리트 얼마 주는지 알아서 “원래 다 안 주기로 했는데 왜 주느냐”고 따지는 게 일이었어(웃음). 그런 팀에서 매리트는 개코나 매리트야(웃음).
1984년 4월 10일 잠실 첫 경기를 치른 후, 선수들의 불만이 ‘불고기 화형식’을 통해 직접적으로 표출됐습니다.
(몸을 소파에 붙이며) 이야, 그거 이야기하면 곤란할 사람들 몇 명 있을 거야. 그 얘긴 그냥 넘어가.
‘불고기 화형식’ 역시 한국 프로야구의 역사 아닙니까.
(한숨을 내쉬며 조용한 목소리로) 참, 그런 행동들을 하더라고. 짜긴 했지만, 회사가 어려웠어.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지. 나는 불고기를 태울 줄은 진짜 몰랐어. 아, 그런데 회장은 눈치가 빠르더라. 내가 말이야. 선수들한테 “왜 안 먹어, 어서 먹어” 하는데 회장이 ‘딱’ 일어나서 나가시더라고. 그러면서 “누구누구 호텔 커피숍으로 오라”고 하는 거야. 가니까 회장이 그래. “내가 2, 3억 원만 더 쓰면 될 텐데, 왜 짜다는 소릴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이야. (헛웃음을 지으며) 허허, 그런데도 구단 이사라는 분은 뭐라는 줄 알아?
?
“회장님. 그게 다 낭비입니다. 다른 구단들은 죄다 헛돈 쓰는 겁니다”하는 거야. (입을 쫙 벌리며) 와! 지독한 사람이더라. 이야, 미치겠더라고. 사실 박건배 회장은 선수단에 뭐라도 해주려고 애를 많이 썼거든. 밑에 분들이 알아서 모신 거지 뭐(웃음).
해태그룹의 야구단 지원은 이후로도 눈에 띄게 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해태는 1986년부터 1989년까지 4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이란 신기원을 작성합니다. 여기다 1991, 1993, 1996, 1997년에 우승하며 한국 프로야구사에 전무후무한 한국시리즈 9회 우승의 이정표를 남깁니다. 한국시리즈에 진출할 때마다 모두 우승한 이유를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앞에서도 말했잖아. 돈을 벌려면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는 길밖엔 없었다니까. 그리고 근성도 있었어. 한국시리즈 돼서 “야, 몸으로라도 맞고 나가”하면 장채근처럼 덩치가 산만한 놈들도 “네, 알겠습니다!”하면서 스트라이크 존 한가운데에 들어오는 공에 맞고 나갔어(웃음).
역대 최고의 투수 선동열이 있었기에 해태의 독주가 가능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진짜 선동열은 아까운 선수야. 빨리 대학 졸업하고 메이저리그에 갔으면 박찬호(오릭스)만큼 좋은 성적을 냈을 거야. (녹차 한 모금을 마시고서) 처음에 동열이가 해태에 입단했을 때 그러더라고. “아직 선발을 못 하겠다”고 말이지.
선발을 못 하겠다고요?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가 별로 좋지 않았거든. 그래서 입단 첫해에 구원투수로만 쓴 거야. 그러다 몸이 좋아지면서 선발로 돌아섰지. (빙그레 웃으며) 새벽까지 술 마시고 나서도 그날 완봉하는 투수 봤어? 그게 선동열이야(웃음).
선동열은 불펜에서 몸만 풀어도 다른 팀에서 경기를 포기할 정도로 엄청난 구위를 자랑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실제로 해태가 1, 2점 차로 이기고 있을 때면 어김없이 선동열이 불펜에 나와 몸을 풀었습니다. 당시 야구계는 이를 가리켜 ‘선동열의 불펜 시위’라고 했습니다. 감독님의 지시로 ‘불펜 시위’가 연출된 건가요?
무슨 소리야. 그건 내 담당이 아니잖아. 투수코치 담당이지. KBS에서 해설하던 하일성이 동열이가 몸만 풀면 ‘위력 시위’니 뭐니 한다고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난 속으로 그랬다고. ‘하일성이 저거 또 구라친다’고 말이지(웃음).
하지만, 그런 선동열도 의외로 한국시리즈에선 큰 활약을 펼치지 못했습니다.
한국시리즈에선 (선)동열이 덕을 많이 못 봤지. 이상하게 한국시리즈만 되면 아팠다고. 그래도 대역이 다 나와. 까치 김정수, 문희수 이런 투수들이 제 몫을 해줬잖아. 그래서 해태가 우승을 9번이나 한 거라고.
![]() 1986년 OB에서 해태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한대화. '해결사'로 오랫동안 해태 신화를 이끌었다(사진=스포츠춘추) |
1986년 이적생 한대화(현 한화 감독)의 가세도 해태 전력에 큰 보탬이 된 게 사실 아닙니까.
(한)대화가 해태 와서 제일 출세했지. 한대화는 나보고 고마워해야 해. 처음에 한대화 보고 “해태에 오라”고 했더니 안 오는 거야. 해태 군기가 세다고 겁을 집어먹었더라고. 간염도 있었고. 그래 내가 그랬어. “난 그렇게 야구를 무식하게 안 시킨다. 선수 체력에 따라서 시킨다. 걱정하지 말고 오라”고 말이지. 한대화 동국대 은사였던 김인식 코치를 몇 번이나 보냈지. 그랬더니 (한대화가) 광주로 오더라고.
한대화를 원래부터 꼭 팀에 필요한 선수라고 보신 겁니까.
한 번도 말한 적이 없는데. (잠시 말문을 닫았다가) 이야, 오늘 이것도 이야기하나.
지금 들려주시는 말씀이 모두 역사 아닙니까.
가장 큰 이유는 말이지. 한대화 아버지가 이북 출신인데, 나와 고향이 같더라고(웃음). 대화는 지 잘한 것만 알지, 그것까진 모를 거야(웃음).
그런 한대화였지만, 1993년이 끝나고 LG로 트레이드됩니다. 그해 올스타전에서 감독님께 발길질을 당한 게 한대화가 트레이드를 요구한 이유라고 전해지고 있는데요. 저도 당시 중계를 봤던 기억이 납니다만, 감독님이 한대화 엉덩이를 발로 차시던 게 생각납니다.
그거이 다 잘못 알려진 거야. 차긴 누가 차. 한대화가 타석에 나가야 하는데 멀뚱멀뚱 있더라고. 그래서 “야, 인마 뭐해”하고 장난으로 발로 차는 시늉을 한 거지, 그게 어디 발길질이야. 올스타전이 잔치잖아. 나도 평소에 안 하던 액션을 보여준 거지. 그런데 그걸 또 그렇게 해석하더라고. 생각해봐. 누가 올스타전에서 인상 쓰면서 선수를 발로 차겠어. 안 그래?
당시에는 왜 그런 내막을 이야기하지 않으셨습니까.
일일이 대꾸하면 뭐해. 사람들이 말한다고 “아, 그러셨습니까”할 거 같아? 다 자기 좋은 데로 생각하지.
단기전에 강한 해태였지만, 준플레이오프에서는 크게 강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습니다.
난 솔직히 정규 시즌 3위하고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는 건 아니라고 봤어. 그건 제도가 잘못된 거야. 지금은 4위까지 포스트 시즌에 올라가잖아. 한국시리즈는 정규 시즌 1, 2위 팀끼리 하는 게 맞아. 그래서 해태 있을 때 정규 시즌 3, 4위하면 선수들 보고 “그냥 쉬어”했다고. 진짜야. 그럴 땐 경기 다 끝나고서 선수들이랑 마이크 잡고 노래 부른 다음에 아예 시즌을 접었다니까.
"야구는 감독이 아니라 결국, 선수가 하는 것" 한국시리즈 우승 뒤 광주시장으로부터 축하선물을 받고 있는 김응룡 감독(사진=스포츠춘추)
“김무종이 김응룡 감독의 처사에 소극적으로 저항한 적이 있어요. 감독실에 들어가서 무슨 말을 나누다가 갑자기 김무종이 밖으로 나오더니 어디론가 도망을 가는 거에요. ‘무슨 일인가’ 싶었죠. 김무종이 뒤로 김 감독님이 쫓아오면서 고래고래 소릴 지르더라고요. 한쪽 손에 방망이를 쥐고 있었는데, 김무종이 호텔에 와서 그러는 거예요. “저 오늘 완전히 죽을 뻔했습니다”라고 말이죠”
- 전 해태 투수 주동식 -
요즘 프로야구 감독들의 리더십은 천차만별입니다. 하지만, 대세는 선수 위에 군림하려는 ‘황제 리더십’보단 선수들을 잘 다독거리고 격려하는 ‘부드러운 리더십’인 듯합니다. 감독님은 선수들에게 훈련과 경기를 맡기는 ‘열린 리더십’을 보여줬다는 평인데요. 그러나 표면적으론 매우 무서운 ‘호랑이 감독'의 이미지였습니다. 해태 출신의 모 야구인은 갑자기 감독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시계를 부수고, 의자를 집어던지는 등 과격한 액션을 많이 취했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다친 선수가 없는 거 보면 참 신기하다고 하던데요.
간혹 가다 그런 짓을 했지. 그런데 난 선수들은 절대 다치지 않게 했어. 누구처럼 선수 때려서 해골을 깨지게 하진 않았다고(웃음). (오른쪽을 가리키며) 이리 도망가면 (왼쪽을 가리키며) 여기다 방망이나 시계를 던졌다고. 실제로 맞추는 것보다 그놈이 다른 선수들한테 가서 “이야, 나 제대로 맞았으면 죽을 뻔했다”고 말하는 게 공포심을 주는 게 더 효과적이거든(웃음).
팀 분위기를 다잡으려는 방법이었나요.
그렇지. 그러면서 잡는 거지. 미련하게 뭐 하러 때려. ‘딱’ 봐서 제일 소리 요란한 거 있으면 그걸 냅다 던지면 된다고. 그럼 ‘와장창’ 부서질 거 아니야. 헤벌레 하고 있다가도 그 소리 들으면 정신들을 차린다고. 난 0대 10으로 지고 있을 때 나가서 심판한테 항의하기도 했어.
역시 팀 분위기를 다잡는 차원이었습니까.
내가 나가면 선수들이 “우린 포기하고 있는데, 감독은 아직 포기하지 않고 계속 붙으려고 하는구나” 생각할 거 아니야.
선수들이야 각오를 새롭게 다졌겠습니다만, 심판들은 꽤 피곤했을 듯합니다. 실제로 감독님은 20년간 프로 감독을 맡으면서 총 5차례 퇴장과 12번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1983년 6월 14일 대전 OB(두산의 전신)전에선 심판실에 난입해 심판을 폭행한 바람에 경찰에 입건되기도 하셨습니다. KBO의 중재로 풀려나긴 했습니다만, KBO로부터 50만 원의 벌금과 3경기 출전정지의 징계를 받았는데요.
난 성질이 급해서 욕부터 이거 먼저 나와. 그러니까 만날 퇴장당한 거 아니야. 김성근이처럼 조근조근 말로 약올려야 하는데, 나가자마자 “에이, XX”하니까 구심한테 “김응룡, 퇴장!” 소리만 들었다고. 그런데 심판실에 난입해 심판을 폭행했다는 건 다 헛소리야. 때리긴 누가 때려. 심판실에서 의자 발로 찬 게 폭행이야? 진짜 사람을 때렸으면 내가 바로 나왔겠어. 삼미 김진영 감독은 그물망 밖에 있는 심판보고 발차기했다고 구속됐는데, 그것 보면 참 그땐 옛날이었어.
요즘 프로야구계에선 ‘강하고 긴 훈련’이 유행입니다. 비활동 기간인 12, 1월에 더 많은 훈련을 합니다. 스프링캠프 전에 장기간의 마무리 훈련을 하는 구단도 많고요. 특히나 시즌 중에도 휴식일인 월요일에 훈련하는 구단이 부지기수입니다. 물론 장점이야 많겠지만, 올 시즌 그런 팀에서 주로 부상선수가 속출하는 것만 보면 ‘강하고 긴 훈련’의 단점도 우리가 주목해야 하지 않나 싶은데요. 과거 해태는 ‘강하고 긴 훈련’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생각입니다.
요즘 보면 ‘훈련 많이 하기’ 시합들을 하는 것 같아. 누가 해태로 트레이드돼서 오자나. 그럼 첫마디가 다 “훈련, 이게 끝입니까”야. 스프링캠프 때도 그래. 난 3시간 지나면 뭘 더 훈련할 게 있는지 모르겠더라고. 그래도 말이지. 3시간 동안엔 정말 바짝 정신 차리고 훈련하도록 했다고. 선수들도 그랬어. “우리 3시간 훈련이 다른 팀 8시간 훈련보다 훈련량이 많다”고 말이지. 3시간 동안 쉬는 놈 없이 계속 훈련을 시켰거든.
대개 감독들은 훈련량이 적으면 불안하다고 하시던데요.
불안할 거 뭐 있어. 프로야구 선수가 돈 벌려면 자기들이 알아서 하는 거지. 감독도 좀 재밌게 즐기면서 살아야 할 거 아니야. 감독은 만날 선수만 감시하고 있나(웃음).
2001년 해태에서 삼성 감독으로 가셨을 때도 훈련량은 비슷했습니까.
그렇진 않았지. 대기업 삼성에 오니까 나도 안 되겠더라고. 훈련 시간 좀 늘렸지. 해태 있을 땐 내 마음대로 했는데(웃음). 그런데 말이야. 훈련이 불필요하게 길면 선수들 사이에서 요령이 생긴다고. 하루 사무실에 앉아 있어도 8시간 이상 일을 안 시키는 이유가 뭐야. 전력을 다해 일하지 않기 때문이야. 야구도 그래. 타성에 젖고, 요령이 생기면 실전 때 제 모습이 안 나와. 박 기자도 알다시피 요즘 일본 프로야구도 연습을 많이 안 시킨다고. 우리보다 야구 역사가 긴 메이저리그랑 일본 프로야구가 왜 훈련을 줄였는지 그걸 제대로 알 필요가 있어.
해태 출신 야구인들은 한결같이 “단체 훈련시간은 적어도 선수들이 알아서 개인훈련을 더 오래 했다”고 하더군요.
그게 야구야. 단체 훈련을 너무 많이 시키면 빨리 지친다고. 선수들 스스로 뭐가 모자란 지 깨달을 시간이 사라진단 말이야. 어느 정도 힘을 남겨둬서 개인 훈련을 하도록 배려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라고. 정말이야.
![]() 해태가 배출한 불세출의 투수, 선동열(사진=KBO) |
해태는 해태를 싫어하는 팬들도 경기에 몰입하게 할 만큼 호쾌한 야구를 선보였습니다. 희생번트를 거의 대지 않고 강공의 연속으로 상대팀을 압도했습니다.
번트란 게 말이야. 보기엔 쉬워도 성공하기가 만만치 않은 기술이야. 설사 성공한다손 쳐도 어차피 다음 타석에서 안타나 외야 플라이가 나와야 득점으로 연결된다고. 그럴 바엔 처음부터 강공으로 가서 안타를 기대하는 게 낫다고 봤지. 안타 나오면 대량득점을 올릴 수 있잖아. 그래도 삼성 가서는 많이 댔어.
왜였습니까.
왜긴 왜야. 번트 안대서 졌다고 청문회 열까 봐 그랬지(웃음). 해태 있을 땐 팬들이 “청문회 하자”하면 “그래? 알았어. 다 오라우”했는데 말이지.
번트 말고도 별다른 작전을 내지 않으셨는데요. 이유가 있으셨나요.
현장에서 잘 보라고. 3루 주루코치가 벤치에서 나오는 사인을 한참 동안 본다고. 그걸 이번엔 지가 선수한테 (사인 내는 시늉을 하며) ‘막’ 낸다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렇게 하면 타자나 주자나 그거 보다가 지쳐. 해태 때는 작전이 ‘딱’ 하나였어. 히트 앤드 런이었어. 그것도 한 경기에 두 개 나오면 많이 나왔다고. 그래도 이겼잖아(웃음).
야구계에서 흔히 ‘쿠세(습관)’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상대팀이 투수의 습관을 잡아내 예측 타격을 하기도 합니다만, 벤치의 사인도 훔쳐 작전에 활용하는 때도 많이 있는데요. 그렇게 사인이 단순하면 상대팀이 이를 간파하고 사전에 대비했을 법도 합니다.
(뭔가를 생각하면서) 그때가 언제야. 어, 그래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다. 그때 일본 대표팀 전력분석원들이 대거 내한해서 우리 경기를 다 보고 갔다고. 그걸 보면서 사인을 캐치하지 않았겠어. 구장을 둘러보니까 일본 전력분석원 세 놈인가가 내 사인을 보고 있더라고. 난 (코를 가리키며) 여기 만지면 번트, (가슴을 만지며) 여기 만지면 히트 앤드 런 이었거든. 그런데 말이야. 막상 올림픽 때 일본전을 하는데, 일본 벤치에서 난리가 난 거야. 웬 줄 알아? (모르겠다고 하자) 히트 앤드 런 사인을 냈는데 막상 일본 투수가 피치 아웃을 시키면 배트를 뒤로 빼거든. 주자도 안 뒤고. 난 속으로 그러지. ‘에라, 이놈들아 내가 너거들 수법을 모를 거 같냐’(웃음). 다 알고 사인을 바꿔놓거나 역이용했지.
예전 이종범과 인터뷰를 했더니 “해태 있을 때 모든 도루는 ‘그린 라이트(벤치 사인 없이 선수가 알아서 도루를 시도하는 것)’였다”고 하더군요.
그럼, 그거 다 종범이 지가 알아서 뛴 거야. 생각해보라고. 이종범이 김응룡보다 야구를 잘하는데 뭔 지시가 필요하겠어.
그런 까닭일까요. 유독 해태는 이기나 지나 경기 시간이 무척 짧았습니다. 프로야구 30년 동안 2시간 이내(정규 이닝 기준)로 끝난 10경기 가운데 해태 경기가 무려 6경기나 됩니다. 1991년 9월 7일 광주 LG-해태전은 4대 0으로 해태 승리로 끝났는데요. 이때 경기 시간은 고작 1시간 39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프로는 어디까지나 관중을 생각해야 하거든. 물론 프로는 이기는 게 목적이지만, 관중이 즐겁지 않으면 그건 이겨도 이긴 게 아니야. 승부가 이미 기울었는데도 선수를 자꾸 바꾸고, 사인 내는 걸로 시간을 허비해봐. 그런 경기를 보면 다시 야구장에 오고 싶겠어.
겉으론 호랑이 감독, 그러나 여리고 소심했던 코끼리 감독 삼성 사장 퇴직 후, 제주 서귀포 야구인의 마을에 머물고 있던 김응룡 전 감독. 그는 현역에서 은퇴한 이후에도 제주 야구발전을 위해 온 힘을 쏟고 있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보기엔 김응룡 감독이 굉장히 대범해 보이잖아요. 냉혹해 보이고. 그런데 옆에서 보면 무척 여린 분이에요. 경기 때도 위기 순간이 오면 그라운드를 못 보세요. 일부러 딴 곳을 보거나 땅바닥을 보신다고요. 한국시리즈 때 우승할 때 중계화면을 보면 한 번도 그라운드를 본 적이 없으셨어요.”
- 전 해태 타자 이순철 -
감독 시절 마운드에 오르면 예외 없이 투수를 교체하셨습니다. 승리를 눈앞에 둔 투수도 가차없이 강판을 지시하셨는데요. 그걸 보고 많은 야구팬이 “김응룡 감독은 참 냉정하다”는 평을 하곤 했습니다.
감독이 마운드에 올라가면 (투수를) 바꾸러 올라가는 거 아니야. 내가 올라가면 무조건 바꾸는 거야. 투수코치가 올라가면 작전 이야기하는 거고. 애매할 때가 있긴 하지. 그땐 투수코치를 이래 보지. 투수코치가 “바꾸시지요”할 때도 있거든. 대부분은 투수코치와 의견이 일치했던 것 같아. 돌아보면 임신근, 이상윤, 김인식 같은 투수코치들이 다 잘했어.
감독의 업무 가운데 투수교체 타이밍을 잡는 게 가장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잘 교체해 팀이 이겨도 선발투수가 승리를 챙기지 못했다면 ‘냉혈한’으로 비난받고, 한 박자 늦게 교체해 팀이 지면 ‘무능한 감독’으로 낙인이 찍히기 때문인데요.
난 투수교체가 전부 한 박자 빨랐다고. 감독이 욕먹기 싫으면 투수가 실컷 터지고 난 다음에 교체하면 돼. 하지만, 이기고 싶으면 투수가 터지기 전에 바꿔야 한다고.
마운드에 올라 투수교체를 할 때는 주로 어떤 말을 하십니까.
뭘 뭐라고 해. “이눔의 자식, 잘 던졌어.” 그럼 끝이지.
그런데 해태 시절, 언제부터인가 직접 마운드에 올라오는 일이 줄었습니다. 1990년대 이후로는 거의 보질 못했는데요.
방수원이라고 알지?
프로야구 첫 노히트노런을 기록한 해태 투수 아닙니까.
한번은 마운드에 올라가서 투수교체를 하려고 공을 달라고 했더니, 이눔의 자식이 2루까지 도망가는 거야. 아따, 창피하더라고. 안 그래? 관중석이랑 TV로 그 모습을 다 봤을 거 아니야(웃음). 그날 이후부터 창피해서 마운드에 못 올라가겠더라고. 투수 바꿀 땐 구심 쳐다보면서 “어이, 누구누구로 교체”하는 식으로 말로 했지.
선수가 홈런을 쳤을 때도 벤치에서 나와 화이파이브를 하는 일이 없으셨습니다. 그저 묵묵히 의자에만 앉아계셨는데요.
난 뭐 창피해서 그런 거 못하겠더라고. 다 자식 같은 놈들인데 나가서 손 내밀고 그런 게 좀 낯 뜨겁더라고.
냉정한 지도자들을 보면 실상은 매우 따뜻할 때가 많습니다. 감독님도 표면적으론 냉혹한 승부사였지만, 잘 던진 투수나 잘 친 타자가 있으면 경기 끝나고 칭찬 정도는 하시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렇지 않아. 난 칭찬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 친척이라고 할까 봐.
친척이요?
(김)종모가 잘할 때 칭찬하면 여기저기서 “감독이 종모랑 친척인가 보다”하는 소리가 나온다고(웃음). 아예 칭찬을 안 하는 게 좋아.
이순철 전 LG 감독이 그러더군요. “김응룡 감독은 성격이 급하셔서 샤워도 3분 만에 하셨다”고요.
빨리 샤워해야 빨리 다음 구장으로 이동할 수 있을 거 아니야.
감독이 그렇게 빨리 샤워를 끝마치면 선수들도 보조를 맞출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내가 삼성에 와서 프런트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여기는 오후 1시에 구단 버스가 출발하면 그 시간에 맞춰 오는 선수가 거의 없다는 거야. 그래 내가 항상 출발 20분 전에 버스에 올라탔다고. 지들이 별수 있어. 빨리 와야지. 실은 말이야. 성격이 급한 것보다 지각하는 놈들을 한 명씩 10분만 기다려도 1시간이 훌쩍 넘어버린다고. (문득 뭔가 생각난 듯) 해태 있을 때야.
네.
부산으로 가려고 버스가 출발하는데 뒤에서 “스톱! 스톱!”하는 소리가 들려. 알고 보니까 지각한 놈이 버스를 세우려고 한 거야. 기사가 버스를 세우려고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막’ 화를 내면서 “얼른 계속 안가”하고 소릴 질렀다고. 결국, 걔 어떻게 왔는지 알아? 부산까지 택시 타고 따라왔어. 그다음부터 열외 없이 다 출발 20분 전에 버스에 타더라고(웃음). 아, ‘버스’하니까 또 생각나는 게 있다.
뭔가요.
해태 있을 때 선수들이 한 번씩 풀어진다고. 그럼 속으로 ‘이것들을 어떻게 기합주나’ 연구를 한단 말이지. 하루는 야간경기를 끝내고 버스를 탔다가 기사한테 “광주로 바로 가지 말고 장성으로 가자”고 했다고. 그럼 기사가 알아서 장성에서 차를 세워. 그러면 내가 선수들한테 “야! 이눔의 자식들, 다 내려서 광주까지 뛰어와!” 불호령을 내려.
다들 광주까지 뛰어왔나요.
저그들이 어떻게 할 거야. 뛰라면 뛰어야지. 1983년 42살의 나이로 광주에 내려갔으니까 그때 내가 얼마나 팔팔했겠어.
![]() 타이완 전지훈련 당시 식사 중인 김응룡 감독(사진=스포츠춘추) |
늘 중계화면이나 구장에서 보면 철제 의자에 앉으셔서 경기 내내 일어날 줄을 모르셨습니다. 구레나룻을 기르시고, 모자를 삐딱하게 쓴 채 경기를 응시하시던 때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나는 모자를 바로 쓴 거 같은데 다들 이상하게 삐딱하게 썼다고 하더라고. 구레나룻은 그때 그게 유행이었던 것 같고. 보기엔 의자에 계속 앉아 있는 게 편해 보이지? 아니야. 계속 앉아있었더니 엉덩이에 땀띠가 생겨서 굉장히 고생했다고(웃음).
그렇게 엉덩이에 땀띠가 생기시는 데도 요지부동의 의자에만 앉아 계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궁금합니다.
난 말이야. 사람 만나고, 말하고 이러는 걸 싫어했거든. 그래서 낯을 많이 가렸다고. 100번 정도 그 사람을 만나야 이야기를 하지, 한두 번 본 사람이랑은 지금도 말을 잘 안 해.
현역 때부터 스타 선수라, 많은 사람을 만나고 교우관계를 맺으셨을 것 같은데 어째서 사람 만나는 걸 꺼리신 겁니까.
당신도 나처럼 30, 40년간 시달려봐. 그럼 알 거야. 해태 있을 때 말이야. 무등산으로 등산을 가면 말이지. 난 내 코스가 따로 있었어. 사람들이 안 다니는 길로만 다녔으니까. 한번은 사람 안 다니는 길로만 다니다 길을 잃어버려서 절벽 아래로 떨어질 뻔 했다고(웃음). 이야, 그때 정말 아찔하대.
과거 기자들이 가장 인터뷰하기 까다로웠던 감독으로 감독님을 꼽는 것도 그러한 배경이 있었겠군요.
사진 기자들이 사진 찍으려고 하면 모자를 ‘푹’ 내렸다고. 아니면 얼굴을 돌리고 말이지. 취재 기자들한테도 그랬어. 되도 않는 질문하면 대답도 안 했다고. (갑자기 웃음보가 터지며) 정말 프로야구 초창기 때는 야구 수준도 낮았지만, 스포츠 언론 수준도 참 낮았어. 한번은 말이지. 3회인가 끝났을 때야. 한창 경기 중인데, 기자 한 명이 더그아웃까지 뛰어와서 “감독님, 왜 투수를 교체했습니까”하고 묻는 거야. 경기 중에 내려와서 질문하는 게 말이 돼? 그래 내가 화가 나서 방망이를 드니까 이 기자가 도망가는 거야. 그걸 잡으려 몇백 미터를 달려갔다고(웃음). 그래도 참 그땐 기자들과 정이 있었다고.
20년 동안 감독을 맡다 보면 좋은 기사도 접하지만, 그렇지 않은 기사도 접하게 마련입니다. 매일같이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스트레스를 받으셨을 듯합니다만.
기자들이 날 갈기는 건 겁이 안 났어. 솔직히 말해 신문을 잘 안 봤거든. 그런데 야구장 나가서 기자들 눈을 보면 오늘 내 기사를 나쁘게 쓴 기자가 누군지 ‘딱’ 알겠더라고. 어렸을 때부터 계모 눈치를 보면서 살아서 그런지 내가 눈치 하나는 끝내줬거든. 아니나다를까 매니저한테 “오늘 어디 어디 신문 좀 가져오라우”하면 정확해(웃음). 그때 매니저가 그랬다는 거 아니야. “우리 감독은 참 이상해. 백날 신문은 쳐다보지도 않다가 자기 조지는 기사만 나오면 귀신같이 안다”고 말이지(웃음)
그래도 감독 시절에 ‘설화(舌禍)’에 시달린 적은 한 번도 없으셨습니다.
쓸데없는 소릴 안 했으니까.
흔히 있을 법한 ‘김응룡 사단’이란 말도 감독님은 한 번도 듣지 않았습니다.
난 ‘사단’ 그런 거 없어. 삼성으로 옮길 때도 나 혼자 갔지. 나 나가고 해태에서 실업자 된 코치들이 있어서 데려온 게 다지. 난 인생 자체가 독불장군이야. 이북에서 내려올 때 몸뚱이 하나만 들고 내려왔기 때문에 누구한테 의지하지 걸 싫어했다고.
하지만, 감독님과 함께 했던 이들은 하나같이 ‘정에 약한 사람이었다’고 회상하더군요.
정에 약하긴 했지. 그러니까 야구인들이 “감독님, 저도 밥 먹고 살아야 합니다”하면 마다하지 않고 다 오라고 한 거지. (물 한 모금을 마시고서) 성격도 성격이지만, 감독이란 자리는 늘 외로운 것 같아.
감독, 얼마나 외로운 자리입니까.
힘들잖아. 순간순간 결정하는 게 얼마나 힘들어. 김경문이 보라고. 베이징올림픽 금메달이 뭐 필요하냐고. 성적 나쁘면 가는 거야. (선)동렬이도 봐. 한국시리즈에서 지니까 바로 옷 벗잖아. 프로의 세계는 비정한 거야. (혼잣말을 하듯) 그래서 한시라도 마음 놓을 수가 없어. 감독은. 하지만, 항상 이길 수가 없다는 게 딜레마지, 딜레마….
또 다른 고향, 광주 1987년 광주구장에서 삼성을 꺾고 해태가 우승하자 선수들이 김응룡 감독을 헹가래치고 있다(사진=KBO)
“삼성 감독으로 갔을 때도 광주구장에 오면 관중이 내 이름을 불러줬다고. 광주,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또 다른 고향이지, 고향.”
- 전 해태 감독 김응룡 -
평안남도 평원 출생이십니다. 유년시절은 피난 후, 부산에서 보내셨고요. 20살 이후로는 실업야구에 몸담으면서 서울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1983년부터 2000년까지 해태 감독으로 광주에서 사셨습니다. 여기다 2001년부터 2010년까지 삼성에서 감독과 구단 사장을 역임하면서 대구에 계셨습니다. 고향이 5곳이라 말할 수 있는데요. 그 가운데 광주에 대한 기억이 각별하셨을 듯합니다.
그렇지. 18년 동안 살았으면 완전히 광주사람 다 된 거지.
1983년이면 광주항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인데요. 당시 상대팀 출신 야구인들의 말을 들어보면 “광주구장에 도착하는 순간, 오금이 저렸다”고 하더군요. 그 정도로 살벌했다는 뜻인데요.
살벌했지. 딴 팀들 광주 오면 엄청 긴장했어(웃음).
1980년엔 광주항쟁의 후폭풍을 염려한 당국에서 5월 18일만 되면 일부러 광주에서 해태 홈경기를 못하게 했다고 하더군요. 일부에선 승부조작을 하려고 했다는 소문도 있었고요. 30년이 다된 이야기니 진실을 알고 싶습니다.
이번에도 이야기 안 해주면 또 역사가 뭐니 운운할 거지?(웃음)
아, 네….
(자세를 고쳐 앉으며 신중한 표정으로) 다 지난 이야기니까 해줄게. 간섭을 하려고 했어.
실제로요?
(고개를 끄덕이며) 그때 안기부 사람이 찾아왔다고. “왜 왔느냐”고 물으니까 “상대팀하고 잘 이야기해서 내일 져줄 수 있겠냐”는 거야. 기가 막히더라고. “이 양반아, 야구가 레슬링이야. 짜고 치게. 야구에선 이기고 진다고 소란 생길 일이 없어. 미안하지만, 난 오늘도 이기고 내일도 이길 거야. 염려하지 말고 가. 누가 소란피우면 내가 책임질테니까”했지. 당국이 그랬는지 몰라도 그 사람 혼자만의 생각이라도 위험한 생각이었지.
결과는 어땠습니까.
첫날은 이기고, 다음날은 졌지. 당국에서 참 괜한 신경을 많이 쓰던 시절이야.
광주시민이 감독님 손을 붙잡고서 “꼭 야구로 우리의 한을 풀어달라”했다고 했다던데요.
글쎄. 그런 것도 있었겠지. 지금도 귀에 선하다고. 해태가 몇 점 차이로 이기고 있으면 관중석에서 ‘목포의 눈물’이 울려 퍼졌다고. 그게 그분들이 한을 표출하는 방법이 아니었겠어. 그래도 호남 야구팬들은 참 순진하고, 좋은 분들이었어. 한가지 예를 들어줄까?
네.
하루는 말이야. 비가 와서 경기가 취소됐어. 공교롭게 경기 취소가 되자마자 햇살이 쨍쨍 내리쬐더라고. 그래도 어떻게 해. 이미 경기는 취소됐는데. 그래 당시 구단 사장님하고 저녁에 소주 한잔을 하고 있었다고. 아, 그런데 단장이 “큰일 났다”면서 뛰어오는 거야.
큰일이요?
그렇다니까. 군산, 순천에서 해태 경기를 보러 300명인가 왔나 봐. 그 양반들이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왜 경기를 하지 않느냐. 사장 나와서 청문회를 하자”고 한 거야. 사장이 ‘달달’ 떨더라고.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내 말 계속 들어봐. 그래서 “뭐야, 알았어. 내가 가지”하고 그 양반들 있는 데로 갔어. “왜 그러시냐”고 했더니 “우리가 다들 먼 곳에서 억지로 시간 내 광주까지 왔는데 왜 경기를 안하느냐”고 하더라고. 그래 내가 그랬지. “이봐, 오늘 경기하면 우리가 져. 그리고 선수들 다치면 어떻게 할 거야. 내일 이길 테니까 꼭 지켜보라”고 했지.
팬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주모자로 보이는 양반이 “들으셨지요. 감독님이 내일 이긴다고 했습니다. 우리 오늘은 돌아가고 내일 다시 옵시다” 하는 거야. 술자리에 돌아오니까 사장이 물어. “어떻게 됐느냐”고. “뭐 어떻게 되긴 어떻게 됩니까. 내가 다 보냈죠”했지. 그만큼 해태 팬들이 순수했어.
광주가 가장 먼저 신축구장을 만들기로 발표하고, 열심히 일정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전 광주구장은 물방개가 살 정도로 환경이 극악했습니다. 감회가 남다르실 듯합니다.
그땐 비만 오면 물이 안 빠졌어. 관중석에 보면 잔디가 멀쩡하거든. 그런데 막상 잔디를 밟으면 완전 늪이야, 늪(웃음). 그래도 우리는 롯데처럼 배수구 막아놔서 일부러 경기 안 하고 한 적은 없어(웃음). 이제 잠시 쉬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이러다 밑천 다 떨어지겠어. (계속)
3편에서 계속 됩니다.
'세상이야기 > 스포츠머신'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1는 SK는 9년 전 LG의 데쟈뷰? (0) | 2011.08.19 |
---|---|
[박동희의 Mr.베이스볼] 김응룡 회고록[3] (0) | 2011.08.16 |
[권순일의 ‘내사랑 스포츠’]박찬호와 트레비스가 벌컥 화를 냈던 이유는? (0) | 2011.08.15 |
박병호 트레이드 신화(神話)쓸 것인가? (0) | 2011.08.14 |
김응룡 회고록[1] (0) | 2011.08.10 |
'세상이야기/스포츠머신'의 다른글
- 현재글김응룡 회고록[2] ‘숨은 세력은 해태의 패배를 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