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 못떠나는 어느 가장의 죽음
동아일보 | 입력 2011.08.03 03:14 | 수정 2011.08.03 03:31
[동아일보]
이 회사의 서관열 화학주임(49)이 발파작업을 위해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한 뒤 최종 점검을 하는 순간 벼락이 떨어졌다. 벼락은 뇌관을 타고 흘러 발파 스위치를 누르지 않았음에도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하면서 서 씨의 머리 위로 큰 돌들이 쏟아져 내렸다.
"이처럼 폭우가 내릴 땐 공사를 중단해야죠. 이런 위험한 상태에서 어떻게 공사를 계속합니까? 명백한 인재(人災)예요."
1일 서 씨 빈소에서 만난 유족은 울분을 터뜨렸다. 유족은 회사 측과 원청업체인 L사에 사인(死因) 규명과 함께 사과를 요구하며 사고가 난 지 일주일이 지나도록 영결식을 치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죽음에 대한 관심은 싸늘했다. 1일 기자가 시신이 안치된 빈소를 찾았을 때 가족과 친지 대여섯 명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폭우와 벼락이 몰아치는 날 굳이 위험한 작업을 했어야 하는지…."
서 씨의 하나뿐인 아들 민수 씨(23)는 짧은 머리를 움켜쥐며 오열했다. 대학생인 민수 씨는 제대한 지 이틀 만에 아버지의 비보(悲報)를 접했다. 민수 씨는 기자에게 한국산업안전공단에서 작성한 '발파공사 표준안전 작업지침'을 보여줬다. '낙뢰의 위험이 있을 때에는 화약류 취급이나 사용 등의 모든 작업을 중지시키고 작업자들을 안전한 장소로 대피시켜야 한다'는 문구가 뚜렷했다.
실제로 다른 시공사가 담당한 사고현장 바로 반대편 구역은 그날 작업을 중단했다. 하지만 서 씨가 속한 곳은 그렇지 않았다.
서 씨의 부인 이경숙 씨(48·여)는 7개월 전 오랜 전세살이를 끝내고 현재 살고 있는 용산구 원효로 아파트로 이사하던 때를 떠올렸다. "이제 온 가족이 편히 살 일만 남았었는데 다 물거품이 됐네요."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하고 교사자격증까지 딴 남편이 화약주임을 하겠다고 할 때 말리지 않은 데 대한 뒤늦은 후회도 밀려왔다.
사고는 낙뢰가 바닥에 있던 빗물을 타고 뇌관에 전해지면서 일어났다. 하지만 전기에 영향을 받지 않는 '비(非)전기뇌관'을 사용했다면 사고를 막을 수도 있었다. 2000원 남짓 하는 전기뇌관에 비해 비전기뇌관의 가격은 1만6000원 정도. 결국 1만4000원 차이가 생사를 가르게 된 셈이다.
또 설계도상 공사는 터널 단면을 세 부분으로 나눠 폭파하는 '부분발파'로 진행하게 돼 있었지만 사고 당시엔 모든 부분을 한꺼번에 폭파하는 '전단면 발파'가 이뤄졌다. 유족으로선 '조금이라도 폭파 규모가 작았더라면…' 하는 생각을 지우기 힘들다. "기존 설계한 것과 진행이 다르긴 하지만 현장 관행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 회사 측의 설명이다. 서울 관악경찰서와 고용노동부 서울관악지청은 회사 측에 대해 업무상 과실이 있는지와 안전조치 의무를 위반했는지를 조사하고 있다.
유족은 2일 오후 회사 측이 안전기원제를 지낼 예정이란 소식을 전해 듣고 서 씨의 영정을 들고 현장을 찾았다. 하지만 현장 관계자들은 보상협상이 끝나지 않아 안전기원제가 취소됐다며 유족에게 현장에서 나가달라고 요구했다. 유족은 굳게 닫힌 공사장의 회색 철문 앞에서 한동안 기다리다 발길을 돌렸다.
하늘에서는 또다시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살짝 미소 짓는 서 씨의 영정 속 얼굴에도 빗물이 눈물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김성규 기자 sunggy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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