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정치와 사회

니 전라도가? 유령처럼 떠도는 불멸의 낙인

아진(서울) 2013. 8. 31. 19:06

니 전라도가? 유령처럼 떠도는 불멸의 낙인

한겨레 | 입력 2013.08.31 11:40 | 수정 2013.08.31 11:50

 

[한겨레][토요판] 김형민의 '응답하라 1990'


② 김대중과 호남 폄하

"DJ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친구 한마디에 모두가 합창한
"니 전라도가?"
함께 살던 전라도 사람 존재가
1987 대선서 빨갛게 드러났다
불출마 뒤집은 '대통령병 환자'
그에 대한 전라도의 99% 지지
사람들은 그들을 이해하는 대신
인간 이하의 경멸을 쏟아부었다


고교 졸업 이후 한 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가톨릭 사제가 된 친구가 있다. 얼마 전 그 이름을 사제들의 시국선언 기사 머리에서 발견하고 세월의 무상함을 곱씹었다. 그와 마주했던 것도 25년 전의 일이니 사반세기가 그야말로 유수와 같이 흘러간 셈이 아닌가. 그와 내가 스포츠머리 고3이었던 1987년은 16년 만의 대통령 직접선거로 온 나라가 달아올랐던 해였고 뭘 안다고 고딩들도 이따금 뜨거운 토론(?)에 휘말리곤 했다. "이번에 노태우가 되면 대학생들이 바로 학교 점거에 들어가서 우리는 대학 시험 못 본단다" 하는 희망(?) 섞인 전망부터 당시 지역 정서에 따라 "무조건 김영삼이 돼야 한다"고 부르짖던 녀석까지 골고루 섞인 가운데, 훗날 사제가 된 그 친구가 천만뜻밖의 말을 꺼냈다.

"나는 디제이(DJ)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만 통일에 대한 전망이 있는 것 같단 말이다."

녀석의 표정이 어땠는지는 기억하지 않는다. 그 말을 듣고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기억나는 건 주변 친구들의 반응이었다. 그것은 놀랄 만큼 단순하고도 음률까지 동일한 합창이었다. "니 전라도가?"

리트머스 시험지 위 식초와도 같은…

디제이가 불출마 선언을 번복하고 부산의 대표선수 와이에스(YS)와 대결하는 국면이 형성됐을 때 '김대중'이라는 이름은 마치 리트머스 시험지 위에 떨어뜨리는 식초와도 같았다. 한동네에서 구분 없이 뒤섞여 살아가고 있던 '전라도 사람'의 존재가 빨갛게 드러난 것이다. 그야말로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였다. 나는 그때 동네 이발소 아저씨와 저 건너 감나무집 아주머니의 고향이 '라도'라는 걸 처음 알았다. 아니 쑥덕거림 속에 자연히 알게 됐다. "그 사람들 전라도다." 그런 분위기에서 느닷없이 김대중을 지지한다는 녀석에게 "너도 전라도냐?"라는 질문이 꽂힌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물론 녀석은 전라도가 아니었지만.

김대중이라는 식초 방울이 떨어져 빨갛게 변한 리트머스 시험지에 아예 니스칠을 해서 그 색을 고정시켜 버렸던 몇 가지의 계기가 있었다. 그중 둘을 들자면 '99퍼센트의 김대중 지지율'에 대한 경멸과 경계, 그리고 1990년 1월 벽두를 찢었던 3당 합당 선언이었다.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가 노태우 대통령과 김종필 공화당 총재와 나란히 서서 합당을 선언한 이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는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결코 부인할 수 없는 특징 하나는 존재한다. 그것은 정치적인 호남 포위망이었고, 김대중이라는 이름은 그렇게 포위된 성채 위에 나부끼는 깃발이었다.

87년 대선 때 불출마 선언을 번복한 죄로 대통령병 환자, '행동하는 양심' 아닌 '행동하는 욕심'으로 규정됐던 김대중에 대한 원색적인 미움, 그리고 그에게 모든 기대를 투영한 듯 보이는 전라도 사람들에 대한 불이해는 화학적으로 결합하여 90년대 초중반 대한민국의 기도(氣道)에 가래처럼 들러붙어 있었다. "빨갱이 같은 99퍼센트 김대중 지지자"는 그보다 딱 한 칸 아래의 몰표 성향을 가졌을 뿐인 타도 사람들에게 인간 이하의 경멸의 대상이었다. 도대체 왜 그런 지지율이 나오는지에 대한 고려보다는 당최 이상한 사람들이라는 경계가 앞섰다.

그리고 5년 후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과 호남은 또 한 번 쓰라린 패배를 맛본다. 당시 광주 시내의 널따란 호프집이기만 하면 어디서나 수백명이 모여 개표방송을 지켜봤다고 한다. 패배가 확실시되자 음울한 분위기 속에 하나둘 자리를 떴을 것이다. 작별을 고하는 이들에게 어딜 가느냐고 묻자 어떤 이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애 만들러 간다. 왜."

이른바 '쪽수'라도 만들어야 할 거 아니냐는 쓸쓸하고도 한 서린 말.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막막함이 빚은 슬픈 농담.

그즈음 한겨레신문의 박재동 화백은 만평에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사람들이 출근하는 모습을 그렸다. '민주 정부'를 위해 김대중을 지지했던 사람들의 가슴도 그랬겠지만 전라도 사람들의 가슴에 난 구멍에 비할 바는 아니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그로부터 몇 년간, 즉 90년대의 시간들은 전라도 사람들에게 가장 외롭고도 팍팍했던 세월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손님 고향이 부산 맞아요? 처가는 어디요?"

정계 은퇴를 선언했던 김대중이 또다시 그 약속을 깨고 컴백했을 즈음 나는 <전국 주부 대항 퀴즈>라는 프로그램의 지역 예심을 위해 광주에 간 적이 있다. 내가 서울에서 왔음을 안 기사 아저씨는 목적지에 가는 기간 내내 나에게 간절히 호소했다. "아버지가 자식들한테 재산 다 나눠줘불고 나는 이자 안 할란다 할 수도 있지요잉. 근디 그 자식들이 하는 짓 봉께 하나겉이 쓰잘데기가 없고 살림도 다 말아묵는 거 같단 말입니다잉. 근디 그 아버지가 어째야 쓰겄어요? 오냐 난 은퇴했응게 니들 맘대로 혀라 그러면 쓰겄어요?" 그러나 택시에 같이 타고 묵묵히 얘기를 듣고 있던 동료는 내린 뒤에 택시 뒤통수에 대고 이렇게 뇌까렸다. "어이구 좀 좋게 생각하다가도 저런 말 들으면 정나미가 떨어진다. 그저 김대중밖에 몰라 이 사람들은."

97년 대통령 선거전 초입, 이번에는 부산을 방문할 일이 있었다. 택시를 타고 가는데 이번에는 부산 택시 기사가 서울서 다니러 온 손님에게 관심을 보였다. "서울에서는 누가 이길 거 같다고 합니까?" 하는 은근한 질문으로 시작한 대화는 "이번에는 디제이가 될 것 같습니다" 하는 내 대답으로 산통이 깨져 버렸다. 다짜고짜 "손님 고향이 부산 맞아요?"라고 말투부터 바꾸더니 출신 학교를 확인하여 초중고등학교를 다 묻다가 부산의 지리(地理)를 심문했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고향까지 캐묻는 게 아닌가. 유유자적 여유있게 대답하던 나는 기사 아저씨의 마지막 질문에 그만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다.

"처가는 어디요?"

부산 택시 기사 아저씨에게 디제이가 될 것 같다고 떠벌리는 이 수상한 사내는 부산 사람이라 해도 필시 모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프락치였던 것이다.

또 한 번의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1997년이 왔다. 그즈음 나는 갓 '입봉'했던 피디(PD)였다. 대선 당일 나는 어느 여성 기업인의 성공 스토리를 촬영할 계획이었다. 그 사람은 날을 거르지 않고 워커힐 앞길을 조깅으로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융통성을 발휘하자면 뭐 러닝머신으로 대신하거나 그거 편집에서 뺄 생각 하고 안 찍으면 그만이지만, 입봉 몇 달째의 열기 충만, 의욕 과잉의 피디가 그럴 수는 없었다. 아침 8시까지 워커힐로 가야 하니까 여기서 7시 출발 오케이? 이렇게 일정을 짜고 있는데 조연출이 강력한 백태클을 걸어 왔다. 한 시간만 미루자는 것이었다. 그럼 조깅을 9시에 하느냐고 눈을 부릅뜨는데 녀석은 말똥말똥 눈을 뜨고 이렇게 말했다. "저 집이 멀어서요. 투표하고 오려고요."

그는 광주 출신이었다. 그 친구 표정에는 안 그러면 진짜로 촬영을 펑크 내겠다는 기세가 커다랗게 인쇄되어 있었다. 국민의 권리인
참정권
을 행사하겠다는데 이걸 내가 저지한다면 나는 위헌 국사범으로 전락할 판이었다. 결국 여성 기업인은 그날만 9시30분에 조깅을 해야 했다.

한 100평쯤 되는 으리으리한 아파트에서 촬영을 진행하다가 잠깐 짬이 났을 때 그 여성 기업인이 나에게 느닷없는 질문을 해 왔다.

"김 피디, 오늘 우리 편(?)이 되겠죠?"

나는 며칠 전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10초도 지나지 않아 말투로 미루어 경상도, 그것도 대구 출신인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게다가 대한민국 사람들이 흔히 하는 인사법대로 학교는 어디 나오고 등등의 질문을 주고받다 보니 그분도 내 출신지를 알게 되었고 말이다. 정치적 지향과 입장을 서로 확인한 적은 전혀 없었으나, 그분은 너무나도 당연히 '우리 편'이라 나를 불렀다. 그 표현은 오로지 지역적 근거로부터만 산출된 결과였다. 출연자의 비위를 거슬러 좋은 일이 없기에 "예…, 그렇겠죠?"라고 얼버무리는데 이 여성분, 용기를 얻었는지 말이 많아졌다. 김대중은 불안하다는 둥, 전라도 사람들 김대중 되면 독하게 해 먹을 거라는 둥. 순간 당황해서 주위를 둘러보니 다행히 촬영 스태프 중에는 '전라도'가 없었다. 못 들은 척 혼자 묵묵히 벽에다 시선을 고착하고 있던 그 조연출 녀석을 제외하고는.

그 취객의 행패를 2013년 국회서 볼 줄이야

촬영 후 편집실에 앉아 있는데 와야 할 테이프가 오질 않았다. '이놈들이 뭘 하나?' 득달같이 사무실로 달려갔더니, 테이프를 챙겨야 하는 조연출 두 명이 텔레비전 앞에 못박혀 서 있는 게 아닌가. 그래 부아가 치밀어 "야!" 소리를 지르니, 둘이 동시에 내 앞으로 달려왔다. '그래, 이제 정신을 차렸구나.' 그런데 그 녀석 둘은 내 손을 꼭 잡더니, 나지막하게 하지만 우렁차게, 옛날 옛적 국어 교과서의 표현을 빌리면 '소리 없는 아우성'을 토해 냈다.

"선배님. 이겨요 김대중이 이겨요."

고향이 군산인가 했던 여자 조연출은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둘은 몇 시간 동안 티브이 앞을 떠날 줄 몰랐다. 이회창 후보가 치고 올라오면 어 어, 비명을 지르고, 김대중 후보가 앞서면 두 손을 모으면서 기도하며. 휴일 밤이었기에 사무실에는 우리 셋밖에 없었다. 그나마 그래서 그들은 그럴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평소처럼 사람들이 득시글거렸더라면 티브이를 보면서 지금처럼 감정을 홍수처럼 드러내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아니면 비상구 계단에 나가서 라디오를 듣고 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뭔가 궁색할 때 오버하게 된다. 그들의 감정에 쉽게 동화되지 못하던 나는 엉뚱하게 타박을 했다. 그것도 과장된 경상도 사투리로. "이놈들아. 김대중 선생님이 그리 좋나?" 그때 돌아온 대답을 나는 꽤 오래도록 잊을 수 없다.

"선배는 이번에는 김대중 찍어 주겠다고 이야기하고 다니셨죠? 저희는 그런 말 한마디도 못했어요. 전라도 애들이라는 말 들을까봐."

물론 나는 지금도 그들을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건 일종의 낙인 같은 것이니까. 낙인을 찍혀 보지 않은 사람이 낙인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위선 아니면 망상일 테니까. 하지만 김대중이라는 이름 석 자가 그들에게 어떻게 다가갔고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를 대충은 이해하게 됐다. 그건 굳어지다 못해 도리어 상식이 되어버린 한 사회의 '비상식'에 대한 도전의 몸부림이었다. 어느 지역 출신이라는 이유로 묘한 시선을 받아야 하는 세상, 한묶음으로 치부되어 듣도 보도 못한 고향 사람들의 허물까지 뒤집어써야 하는 억울함, 대한민국 군대에 의해 죽어간 사람들의 혼이 중천을 떠돌고 있는데 그 죽음의 가해자, 가해자들과 손잡은 사람들에게 표를 주지 않는다고 해서 "99퍼센트 지지"라는 비난을 들어야 하는 뼈아픈 현실에 대한 항의였던 것이다. 그리고 1997년 12월18일, 그들은 그렇게 손 모아 기도하고 열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선 뒤 크리스마스에 나는 휴가를 내어 부산을 찾았다. 서면 어디께에선가 술을 마시는데 한 아저씨가 술과 분노에 찌든 목소리로 외쳤다. "쩔뚝발이 저게 대한민국 대통령이가, 전라민국 대통령이지." 앉아 있던 수십명 중에 전라도 출신이 있었을지 모르고, 아버지가 전라도 출신일 이들까지 헤아리면, 그 술집 안에 꽤 많은 '전라민국 인'들이 있었을 텐데, 그 취객은 아랑곳이 없었다.

그날의 흉한 몰골을 나는 2013년, 대한민국 국회의원에게서 보았다. 한 국회의원이 어떤 경찰관에게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광주의 경찰이오, 대한민국의 경찰이오?" 대체 그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질문을 한 것일까. 그 말의 비수가 누구의 가슴에 어떤 방식으로 꽂힐지를 몰랐을까. 아니면 알고도 그랬을까. 역사는 때로는 돌고 돌아 제자리에 돌아오는
회전목마 같다. 아니 너무나도 징그럽게 오래도록 유전된다.

이 지면에 매주 연재하던 '표창원의 죄와 벌'은 '김형민의 응답하라 1990'과 함께 격주로 번갈아가며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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