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정치와 사회

'NLL 프로젝트' 5년간 기회만 엿봤다

아진(서울) 2013. 7. 5. 16:59

'NLL 프로젝트' 5년간 기회만 엿봤다

시사저널 | 조해수·엄민우 기자 | 입력 2013.07.05 11:57

 

'조커'라는 카드 패가 있다. 자기가 편리한 대로 사용할 수 있는 자유패 또는 만능패를 뜻한다. 이 패는 그야말로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할 수 있다. 조커 카드를 쥐고 있으면 패색이 짙은 판도 단번에 뒤엎을 수 있다. 대한민국 역대 대선 정국에서의 조커는 이른바 '북풍(北風)'이었다. 13대 대선(1987년)에서는 'KAL기 폭파 사건', 14대(1992년) 때 '이선실 간첩 사건', 15대(1997년) 때 '총풍 사건', 16대(2002년) 때 '북한 핵 보유 선언' 등 대선 때마다 휴전선을 건너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지난해 12월 18대 대선에서는 NLL 문제가 불거졌다. 그러나 이번 바람은 북풍이라기보다 남풍에 가깝다. 집권 여당이던 새누리당이 5년 전부터 차근차근 준비해왔던 '조커' 패다.

MB(이명박) 정부는 2007년 12월 대선 승리 직후부터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발언 문제를 유심히 들여다봤다. 그 한 축에 국정원이 있었다. 다른 한 축은 새누리당이 담당했다. 위기 국면에서 판을 뒤엎을 수 있는 '조커' 패로 여겼음직한 정황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이때부터 대한민국 역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2007년 제2차 남북정상회담 기록은 정치적 도구로 그 성격이 변질된 채 언젠가는 한번 터질 '시한폭탄' 같은 운명에 놓이게 됐다.





ⓒ 연합뉴스

국정원 보관본이 재생산된 까닭은?

결과적으로 집권 여당은 'NLL 대화록' 공개라는 조커 패를 세 번 만지작거리다가, 기어이 네 번째에 꺼내들었다. MB 정부에서 만들어진 카드가 박근혜정부 때 등장한 셈이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7년 10월2일부터 4일까지 열린 제2차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전문은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에 보관돼 있는 원본과 지난 6월24일 공개된 국정원 보관본 등 2개가 존재한다.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정상회담 준비위원장을 지낸 문재인 민주당 의원은 "대화록 원본은 기록자로 배석한 청와대 안보정책비서관이 녹음해온 파일과 기록 메모에 의해 작성됐다. 그런데 국정기록비서관실에서 녹취를 위해 들어보니 녹음 상태가 좋지 않아, 잡음 제거 등의 장비와 기술을 갖춘 국정원에 파일 등을 넘겨 대화록을 작성케 한 것이다. 그런 연유로 국정원이 청와대의 지시에 따라 정상회담 대화록을 작성해서 청와대에 보고해 왔는데, 종이 문서로 보고하면서 부본(원본과 동일한 내용의 문서)이 국정원에 남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문제는 국정원 보관본 자체에 대한 훼손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문 의원은 대화록이 작성된 시기가 회담 직후 일주일 이내라고 못 박았다. 그러나 보관본 표지에는 '2008.1(생산)'이라고 표기돼 있다. 2007년 10월에 만들어진 원본과 동일한 부본이 2008년 1월께 국정원의 자체 생산에 의해 재작성된 것이다. 따라서 이 국정원 보관본을 재생산본이라고도 부른다. 2008년 1월은 17대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가 승리하면서 여야 정권 교체가 준비되던 민감한 시기였다. 이와 관련해 문 의원은 "국정원의 누군가가 이명박 대통령직인수위 또는 MB 정부에 갖다 주기 위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것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대화록 원본이나 부본을 사본한 것이 아니어서 내용의 동일성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공개된 대화록(재생산본)에 내용의 왜곡이나 조작이 있다면 더 엄청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그 대화록이 누구에 의해, 언제, 무엇을 위해 만들어졌는지, 내용의 왜곡이나 조작이 없는지가 규명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국정원 보관본의 보안 단계는 1급 비밀로 분류돼 있었다. 그러던 것이 원세훈 국정원장이 취임한 지 한 달 만인 2009년 3월, 2급 비밀로 하향 조정됐다. 민주당에서는 보관본이 2급 비밀로 격하된 과정이 밝혀지게 되면 정상회담 대화록이 어떻게 정치에 이용됐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단서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재생산본을 토대로 국정원이 청와대에 보고한 대화록 발췌본은 10·4 남북정상회담 1주년인 2008년 가을 즈음에 만들어졌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이 1주년 기념 특강에서 MB 정부의 대북 정책을 강도 높게 비판하자, 이 대통령이 10·4 선언에 대해 보고할 것을 지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청와대 통일비서관(2009~11년)을 지냈던 정문헌 새누리당 의원은 이때를 "보관본이 2급 비밀로 낮춰진 2009년 즈음"이라고 밝혔다. 이에 비춰보면 대통령비서실에서 MB에게 보고된 문서는 2009년 5월 작성된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검토'인 것으로 추정된다. A4용지 10쪽 분량의 이 문서는 이번에 국정원이 여당 의원들에게 열람케 한 발췌본 내용과 유사하다.

그러나 MB 정부는 이 카드를 결국 까지는 못했다. 2009년 5월23일 노 전 대통령 자살이라는 예상치 못한 돌발 변수가 터졌기 때문이다. 이철우 새누리당 의원은 이와 관련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세히 말하면 폭로하려고 그걸(대화록) 준비하는데,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한 거예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2012년 대선 앞두고 재등장한 대화록

노 전 대통령의 서거로 물밑에 가라앉았던 대화록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은 지난해 18대 대선을 앞둔 시점이었다. 2012년 10월8일 정문헌 의원은 통일부 국정감사에서 "노 전 대통령이 김정일에게 NLL 포기 발언을 했다"고 주장했다. 당시에는 야권에서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의 단일화가 대선의 최대 변수였다. 단일화만 이뤄지면 대선 승리는 '떼어 놓은 당상'이라는 말까지 돌았다. 새누리당에서 반전을 꾀할 만한 카드를 쥐고 있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돌았다. 이 'NLL 조커'였던 것이다. 당시 새누리당은 "2007년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남북정상회담 실무추진단장이었던 노 전 대통령의 '후계자' 문재인 후보가 이 기막힌 사실(NLL 포기 발언)을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국민 앞에 사과해야 한다"며 맹폭을 가했다.

이후 문 후보와 정 의원이 정치적 생명을 걸면서 진실 공방을 벌였고, 새누리당은 대화록을 공개하지 않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국회에서의 증언·감정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의 혐의로 고소까지 했다. 그러나 대선 최대 이슈로 급부상할 것 같았던 NLL 문제는 갑자기 잦아들었다. 2012년 11월23일 '문재인-안철수 단일화'가 이뤄졌지만, 예상외로 폭발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단일화 이후에도 당시 박근혜 후보는 지지율에서 선두를 유지했고, 이런 상황에서 새누리당이 자칫 역풍을 맞을 수도 있는 NLL 카드를 굳이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는 게 정설이다.

이는 박범계 민주당 의원이 최근 공개한 2012년 12월10일 당시 권영세 박근혜 캠프 선대위 종합상황실장의 녹취록에서도 잘 드러난다. 당시 권 실장은 "그거(NLL 문제)는 역풍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말 그대로 그거는 컨틴전시 플랜(비상 계획)이고. '도 아니면 모' 할 때 아니면 못 까지. (중략) 그래서 이거는 우리가 집권하게 되면 까고"라고 말했다. 대선 승리를 어느 정도 자신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권 전 실장의 발언이 있은 다음 날 다시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12월11일 국정원 여직원 댓글 사건이 터진 것이다. 이 사건으로 대선 마지막 레이스는 안갯속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박근혜 후보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까지 몰린 것이다. 위기 국면에서 새누리당은 마침내 NLL 카드를 사용키로 마음먹은 듯하다. 12월14일 당시 김무성 총괄선대본부장은 부산 지역 합동 유세 현장에서 NLL 대화록 내용을 국정원 발췌본과 대부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낭독했다. 권 전 실장의 말대로 하자면 '도 아니면 모' 상황에서 컨틴전시 플랜을 가동한 것이다.

이때도 새누리당은 조커 패를 만지작거렸을 뿐 명확히 공개하지는 않았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12월16일 경찰이 '댓글이 없다'는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하며 상황을 다시 오리무중 속으로 빠뜨렸기 때문이다. 이틀 후 열린 12월19일 대선에서 여당은 승리했다.





2013년 6월, 마침내 조커 카드 사용하다

이처럼 MB 정부에서 NLL 대화록 공개라는 조커 패가 공개될 뻔한 세 번의 기회를 맞았으나, 공개되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박근혜정부로 넘어왔다. 경찰이 국정원 여직원 사건 수사를 조작 은폐한 의혹이 확산되면서 상황은 또다시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6월14일 검찰은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과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기소했다. 정국은 들끓었다.

이때 새누리당 서상기 정보위원장이 NLL 문제를 다시 거론했다. 지난 6월19일 서 위원장은 국정원과 검찰을 향해 "노 전 대통령의 NLL 발언을 즉각 공개하라"고 촉구했다. 하루 뒤인 20일에는 서 위원장이 새누리당 정보위원들과 함께 국정원이 보관 중인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발췌본을 단독으로 열람했다. 마침내 조커 패가 까진 것이다.

그러나 또 한 번의 예상치 못한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6월26일 박범계 민주당 의원이 권영세 전 실장의 녹취록을 공개했고, 때를 같이해 김무성 의원이 이날 열린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정상회담 대화록을 대선 전에 입수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박근혜정부는 국정원 대선·정치 개입 사건이 MB 정부 때 이뤄진 일로 선을 그어왔지만, 권영세 전 실장 및 김무성 의원과 관련된 의혹이 사실이라면 이미 지난해 대선 이전에 국가 기밀문건이 새누리당에 유출됐고 이를 박근혜 후보 캠프가 조직적·정치적으로 활용했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최소한 NLL 문제에서만큼은 MB 정부와 박근혜 후보측의 입장이 서로 통했다는 얘기가 되는 셈이다.

현재 민주당측은 6월27일부터 30일까지 박근혜 대통령 방중 기간 중에는 추가 폭로를 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이 말은 7월 정국의 격동을 예고한다. 아직 공개되지 않은 권영세 전 실장의 발언 녹음테이프에는 '안철수 의원을 이렇게 한다, 개헌을 해서 민주당을 어떻게 한다, 네거티브 캠페인을 한다'는 등 민감한 내용이 포함돼 있다. 민주당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정확한 입장 표명을 하지 않을 때 계속 추가 폭로를 이어가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중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박 대통령의 발걸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을 듯하다.

대통령기록관 열람 문의 '제로'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에는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이 있다. 역대 대통령들이 재임 중 생산한 각종 기록물이 보관돼 있는 곳이다. 대통령기록관은 지난 2007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 재임 중 제정한 '대통령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에 근거해 이듬해 4월 문을 열었다.

대통령기록물은 크게 일반기록물·비밀기록물·지정기록물 세 가지로 구분된다. 일반기록물은 일반인 누구나 열람이 가능하도록 공개된 것이고, 비밀기록물은 차기 대통령이나 국무총리 등 인가권자만 볼 수 있다. 지정기록물은 보안 수준이 가장 높다. 그 기록을 생산한 대통령만 최대 30년간 열람할 수 있도록 자물쇠를 채운 자료가 지정기록물이다. 이것을 열람하려면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거나 관할 고등법원장이 발부한 영장이 있어야 한다.

최근 국정원이 공개해 논란이 되고 있는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은 대통령기록관에도 보관 중인데, 지정기록물에 속한다. 민주당은 국정원에서 공개한 대화록이 조작 가능성이 있어 대통령기록관에 있는 원본 공개를 요구하는 중이다. 기자가 대통령기록관측에 확인해보니 지금까지 대화록 열람과 관련한 문의는 한 건도 없었다. 여타 시민단체 등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10월 새누리당 의원들이 기록관을 방문해 대화록 열람을 요청한 것이 전부라고 한다.

대통령기록관의 기록물 보안은 철통을 자랑한다. 기록물은 보통 전자 매체, 비전자 매체 중 한 형태로 보존되는데 지정기록물 같은 경우 어떤 형태로 저장돼 있는지,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직원들조차 파악할 수 없다. '절차에 따라' 관리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기록관 관계자는 이번 국정원의 대화록 공개로 인해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기록물을 열람하려는 시도가 기록물 보존의 가치를 약화시키는 건 아닌지 우려했다. 그는 "조선시대 때 사초도 마찬가지다. 이런 일이 발생하면 누가 문서를 남기려 하고, 또 누가 제대로 된 자료를 후세에 전달하려고 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대통령기록관 앞에는 '천년의 문(Millennium Gate)'이라고 불리는 탑이 우뚝 서 있다. 나라 기록의 보존을 통해 '선진 일류 국가의 초석'이 돼 천년 미래의 문을 열겠다는 취지가 담겨 있다. 하지만 정치적인 이해관계로 인해 그 취지가 무색해지고 있다.

조해수·엄민우 기자 / chs900@sisa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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