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희의 Mr.베이스볼] 김응룡 회고록[3]
[박동희의 Mr.베이스볼] 김응룡 회고록[3] “웃어라, 웃어. 불난 집이 재수도 좋다.”
2002년 삼성 시절의 김응룡 감독(사진=삼성) |
삼성 사장에서 물러나시고, 조용히 제주로 내려오셨습니다. 오늘도 보니까 산에 오르시고, 길가다 감귤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따서 잡수시기도 하던데요. 뭐랄까요. ‘냉혹한 승부사’에서 ‘따뜻한 자연인’이 되셨다는 느낌입니다.
그렇지. 곰치 보이면 그거 따서 밥에 싸먹고, 감귤 있으면 따서 먹고 하지. 인생 별거 있어. 그러면서 마음 편하게 사는 거지(웃음).
도시에서 오래 산 분들은 제주가 가끔 답답하다고도 하던데요.
다 그러지. 그런데 난 사람 만나는 걸 싫어하는 성격인지, 제주가 참 좋아. 그러다 박 기자 같은 사람 내려오면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좋잖아. 얼마 전에 (이)순철이하고, (선)동열이가 내려왔다 갔다고. 골프도 치고 좋은 시간을 보냈어.
이순철, 선동열 두 분은 감독님과 참 특별한 사이인 듯합니다. 해태 있을 때 두 분은 ‘말썽’과는 거리가 멀지 않았습니까.
멀었지. 둘 다 열심히 했어. 해태 선수들 그렇게 술 마시고 뭐해도 다 자기 할 일들은 했다고.
술 이야기가 나와서 묻겠습니다. 해태 출신 야구인들의 말을 들어보면 감독님께서 사생활은 거의 간섭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해태 출신 야구인 가운데 유독 ‘주당’이 많았던 듯합니다.
나는 솔직히 게네들이 그렇게 술 마시고 다니는지 몰랐다고. 난 경기 끝나면 늦어도 자정이면 자거든. (혀를 차며) 이야, 그런데 인마들은 그때부터 행동 개시하는 거야(웃음). 프로 초창기 땐 정말 술들 많이 마셨지.
선동열 전 삼성 감독도 현역시절에 ‘행동 개시’를 자주 했던 선수였는데요.
그 정도 슈퍼스타면 여기저기서 “술 사겠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어. 그런데 술 마시고 던져도 못 치니까 만날 술 마시고 던진 거 아니야(웃음). 지금 돌아봐도 동렬이한테는 뭐라 하지 않은 것 같아. 자기 스스로 알아서 몸 관리했거든. 간혹 동렬이가 몸이 안 좋다고 하면 다 빼줬다고. 감독의 믿음에 잘 부응한 선수니까 아프다고 하면 그런가 보다 했지, 절대 의심하지 않았다고. 진짜야. 동열이는 야구도 잘했지만, 인간이 된 친구였어.
사생활은 거의 간섭하지 않았지만, 직접 목격을 하면 제재를 하셨다고 하던데요.
내 눈에 안 띄면 난 몰라. 그런데 내 눈에 띄면 아니지. 그래도 그 자리에서 뭐라고 하고 끝내버렸지. 아, 그런데 꼭 보면 미련한 놈들이 있어. 삼성에 있을 때 노장진이가 대표적이야.
노장진이요?
내가 새벽 6시면 꼭 산책하러 가거든. 그날도 산책하러 가려고 호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어. 호텔을 나가려고 하는데 노장진이랑 마주친 거야. 속으로 ‘이야, 나보다 빨리 일어났네’ 그랬지. 그런데 감이 이상해. 돌아서서 “장진아!”하고 불러 세웠지. 얼굴을 자세히 보니까 이게 밤을 새운 거야. 겨우내 고생고생해서 훈련하고 막 시즌에 들어갔는데, 새벽까지 술 마시고 돌아다니면 되냔 말이야. 고민하다가 코칭스태프 회의에서 벌금 300만 원을 매기기로 했다고. 팀 내 벌금 매기면 기자들이 알겠어, 누가 알겠어.
그런데 의외의 사태가 커졌습니다. 노장진이 그만….
(말이 채 끝나기도 무섭게) 보따리 싸고 튀었잖아(웃음). 해태 선수들은 그보다 더한 일을 해도 튄 적이 없어. 그런데 장진이는 보따리 싸들고 한 달씩 나가 있으니 기자들이 모르겠어? 그러니 그게 미련한 놈이지. 참 실력은 좋았는데 말이지. 허허.
“삼성행, 해태 고위층의 권유 때문이었다.” 2000년 10월 30일 삼성 감독에 취임한 김응룡(사진 오른쪽)(사진=삼성)
1999년 해태는 정규 시즌 7위를 기록했다. 모그룹 해태도 부도로 어려운 해를 보냈다. 그러나 문제는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숱한 고난과 시련에도 희망의 새벽별을 노래했던 해태였지만, 투·타의 기둥이었던 선동열에 이어 이종범마저 일본으로 떠난 뒤라, 별다른 호재가 보이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시즌이 끝나자마자 김 감독이 해태를 떠날 것이란 소문이 일파만파로 퍼졌다. 몇몇 언론은 김 감독의 새 둥지로 특정팀을 지목하기도 했다. 바로 삼성이었다. 해태 팬들은 “주요 선수들을 현금 트레이드하더니 이젠 감독까지 팔려고 한다”면서 구단을 맹비난했다. 일부에선 “김 감독이 삼성행을 원했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1999시즌이 끝나고서 감독님의 삼성행 소문이 끊임없이 제기됐습니다. 그 이전에도 다른 팀에서 영입 제의가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나보고 오라는 구단은 한두 군데 있었지. 하지만, 난 해태에서 감독생활을 끝내려고 마음먹었지, 어디 다른 구단으로 갈 생각이 없었다고. 사실 말이야. 나도 해태 있을 때 잘릴 뻔한 적이 있었어.
설마요. 누가 한국시리즈 9회 우승의 감독을 자른단 말입니까.
진짜라고. 그때마다 박건배 회장이 ‘안 돼’해서 계속 할 수 있던 거야. (짓궂은 표정으로) 그때 잘렸으면 롯데 갈 수 있었을까? 어떻게 생각해?
어디 롯데뿐이었겠습니까.
해태는 감독 연봉도 짰어. 한국시리즈 우승을 해도 연봉이 적은 거야. 그래서 재계약할 때마다 “계약금은 필요 없으니까 계약금 줄 돈으로 연봉을 더 올려달라”고 했어. 왜 그랬는지 알아?
저도 궁금합니다.
다른 팀 감독들이 나만 쳐다보고 있었거든. 생각해보라고. 다른 팀 감독들이 연봉 좀 올려달라고 하면 구단들이 뭐라 하겠어. “우승도 못한 감독이 무슨 연봉 인상이냐”고 할 거 아니야. 그런데 우승을 밥 먹듯이 한 김응룡 연봉을 보니까 이건 우승 감독이라도 형편없거든. 주변 감독들이 나만 보면 “네가 연봉을 많이 받아야 우리도 많이 받는다”고 하는 바람에 나로선 계약금을 안 받는 대신 연봉을 올리는 편법을 쓸 수밖에 없었어. IMF 때 애들 둘이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내 연봉으론 감당이 안 되더라고. 그만큼 짰어. (빗방울이 떨어지는 창밖을 보며 혼잣말을 하듯) 참, 그래도 해태 있던 덕분에 오랫동안 즐겼지.
그럼 1999시즌이 끝나고 감독님의 삼성행은 어쩌다 나온 소립니까.
(잠시 침묵하다가) 내가 원한 게 아니었어. 해태에서 부탁하더라고.
부탁이요?
난 해태에서 끝내려고 했는데, 구단에서 “다른 팀에 가서 한 번 더 (감독을) 하시고 끝내는 게 좋지 않으시겠느냐”고 하는 거야.
그래요?
해태 사장하고 삼성 사장하고 이야기를 한 모양이야. 해태 사장이 “삼성 가서 더 해보시라”고 하더라고. 그래 나도 삼성에 가기로 다 합의를 봤다고. 삼성행 발표를 할 즈음에, 삼성 사무실에도 기자들이 모여 있고, 박건배 회장실에도 기자들이 모여 있었어.
기자들이 다 모여 있을 정도면 삼성행이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요. 하지만, 2000년 감독님이 지휘봉을 잡은 팀은 여전히 해태였습니다.
내 말 계속 들어보라고. 원래는 삼성에 먼저 가서 감독 취임 발표를 하는 게 맞았다고. 하지만, 예의가 그게 아니잖아. 박 회장실에서 먼저 찾아갔다고. 아, 그런데 박 회장이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거야.
엉뚱한 이야기라면 삼성행 번복을 요구하신 겁니까.
(무릎을 치며) 그렇지. 나중에 알고 보니까 팬들이 구단에 “선수 팔아먹는 것도 모자라 이젠 팀 기둥인 감독까지 뽑아주느냐”면서 엄청나게 항의를 했나 봐. 내가 인사하러 가니까 박 회장이 고민을 많이 한 것처럼 보이더라고. 그러면서 하는 소리가 “감독님 안 되겠습니다. 1년만 더 해태를 맡아주셔야겠습니다” 이러지 뭐야. 와, 이거 미치겠더라고. 신문에는 이미 ‘김응룡이 삼성에 간다’고 다 나왔는데 말이지.
그래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곤란하니까 가만히 있었지. 그때 박 회장이 삼성 쪽 어느 분한테 전화를 걸더니 나한테 그러는 거야. “지금 삼성에 양해를 구했다”고 말이지. 고별인사 하러 갔다가 다시 눌러앉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그래서 그해 삼성에 가지 못한 거야. 2001년에 삼성에 가긴 했지만, 해태 팬들이 ‘끝까지 의리는 지켰다’고 해서 욕은 안 하더라고. 삼성에 있을 때 광주구장에 오면 타이거즈 팬들이 박수도 쳐주고 그랬어.
해태 시절 김응룡 감독은 심판들 사이에선 거친 항의로 유명했다. 그러나 삼성에 간 이후는 다소 조용했다는 평이다(사진=KBO) |
말씀하신 데로 1년 뒤인 2001년 삼성으로 팀을 옮기셨습니다.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명장이었지만, 18년 동안 한 팀에 있다가 다른 팀으로 간다는 건 명장에게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듯합니다. 거기다 새로 둥지를 튼 팀은 한국 최고그룹 삼성의 야구단이었습니다.
해태 있을 때가 편했지(웃음). 100% 나한테 팀을 맡겼으니까. 해태는 삼성에 비하면 그룹 규모도 작았고. (모자를 바로 쓰고는 방긋 웃으며) 내가 해태에 있을 땐 퇴장을 많이 당했잖아. 그런데 삼성에 있을 땐 퇴장 한번 안 당했다고. ‘쌍시옷’ 들어가는 말도 입도 뻥긋하지 않았고.
왜요?
삼성은 삼성이잖아. 기업문화란 게 있잖아. 그 바람에 내 속이 다 썩었다고. 욕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어야 하는데 그걸 못하니까(웃음).
‘삼성은 삼성이다’ 좋은 말씀 같습니다. 감독님이 부임하시기 전까지 삼성은 프런트의 입김이 무척 센 구단으로 정평이 나 있었습니다. 감독에게 요구하는 것도 많고 말이지요. 감독님도 그런 입김이나 요구를 경험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내가 오기 전까지 삼성 프런트 입김이 셌다라? 글쎄, 난 그건 잘 모르겠어. 삼성에서 내가 감독이 된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을 많이했다고 하더라고. 내가 프런트하고 대립을 많이 하는 줄 알았나 봐. 그런데 막상 내가 감독이 되니까 “감독님처럼 프런트에 잘 협조해주는 감독은 처음 봤다”고 하는 거야.
감독님처럼 한 우물을 오래 판 장인들은 자기 주장이 무척 강하지 않습니까. 특히나 과거 야구인들은 프런트가 말하는 협조나 조언을 ‘간섭’으로 인식할 때가 잦았는데요.
다른 감독들은 장돌뱅이처럼 여기저기 팀을 돌아다녔잖아. 하지만, 나는 늘 한 팀에서만 ‘쭉’ 있었어. 한일은행 감독할 때도 은행장은 5, 6명이 바뀌었지만, 누구도 내 목을 친 적이 없었다고. 해태 때도 그랬고. 그래서 구단이 하는 말이 뭔지, 뭘 필요로 하는지 잘 이해할 수 있었다고. 그 사람들 고충도 알고 말이야. 지금도 삼성가서 물어봐. 나처럼 진짜 협조한 감독이 있었느냐고 말이야(웃음).
어떻게 하셨기에 구단과 마찰 없이 상생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내 목소리만 주장하면 안 돼. 난 늘 구단과 상의하면서 타협점을 찾았다고. 트레이드도 늘 그렇게 진행했어. 구단에 양보할 건 양보하고, 협의할 건 협의하고, 고수할 건 고수하다 보면 얼굴 붉힐 일이 없다고. 감독이 구단의 얼굴마담이긴 하지만, 구단이 감독 소유물도 아니고, 감독도 구단의 한 일원이란 점만 명심하면 돼.
삼성에서 이룬 한국시리즈 10회 우승 2001년 한국시리즈에서 만난 삼성 김응룡(사진 왼쪽부터)과 두산 김인식 감독. 해태 시절 감독과 수석코치였던 두 이는 피할 수 없는 일전에서 명승부를 펼쳤다(사진=삼성)
2001년 삼성 감독에 취임한 김응룡 감독은 그해 팀을 정규 시즌 1위로 이끌었다. 임창용(14승), 배영수(13승), 발비노 갈베스(10승)로 이뤄진 탄탄한 선발진과 노장진, 김현욱, 김진웅으로 구성된 볼펜은 8개 구단 최고로 평가받았다. 타선도 위력적이긴 마찬가지였다. 그해 39홈런으로 홈런왕에 오른 이승엽을 중심으로 마해영, 카를로스 바에르가, 매니 마르티네스가 중심 타선을 이루고 있었다.
여기다 이승엽(1루수), 정경배(2루수), 김한수(3루수), 김재걸(유격수)로 이뤄진 삼성 내야진은 그해 최소 실책을 기록하며 철벽 그물망을 자랑했다.
이에 반해 한국시리즈 파트너였던 두산은 객관적인 전력 면에서 삼성에 한수 아래였다. 10승 투수가 한 명도 없는데다 타이론 우즈, 김동주, 심재학으로 이뤄진 중심타선은 그렇다손 쳐도 나머지 타자들은 삼성보단 다소 파괴력이 떨어진다는 평이 많았다.
무엇보다 두산은 준플레이오프를 거쳐 플레이오프에서 현대를 꺾어온 터라, 체력적으로 삼성에 열세였다. 당시 김응룡 감독은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며 “삼성을 20년 만에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인도할 것”이라 공언했다.
공언은 현실이 되는 듯했다. 2001년 10월 20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두산과의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삼성이 두산에 7대 4로 이긴 것이었다. 당시 역대 한국시리즈에서 1차전을 이긴 팀의 우승확률은 88.2%나 됐다.
1차전이 끝나고 김응룡 감독은 “큰 경기에 약하다던 삼성에서 한국시리즈 1차전을 치른 소감이 어떠냐”는 질문에 “삼성도 잘하네”하며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김 감독은 두산이 플레이오프에서도 현대에 1차전을 지고 내리 3연승을 거둔 걸 알고 있었다. 거기다 아직 삼성은 해태와는 다른 팀이었다.
2001년 두산과의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7대 4로 이겼습니다. ‘삼성의 20년 한(恨)이 이제야 풀리나보다’하는 예상이 많았습니다.
1차전에선 잘 싸웠어. 다음날 2차전을 해야 하는데, 비가 오더라고.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하지만, 그때 비가 안 오고 2차전을 했으면 시리즈가 쉽게 끝났을 거야. 두산은 많이 지쳐 있었거든. 아니나다를까 2차전부터 이상한 거야. 이름은 안 밝히겠는데 모 좌익수가 계속 우왕좌왕하는 통에 경기에 지질 않나, 타자들도 뭔 놈의 긴장이 그렇게 되는지 타석에만 서면 ‘달달’ 떨더라고.
그 정도로 삼성 선수들이 긴장했었나요.
그뿐이었는지 알아? 동점에 투스트라이크 투볼이었어. 슬로커브가 몸쪽으로 들어오는데 ‘스윽’ 몸에 맞으면 되는데, 억지로 그걸 또 피하더라고. 그래놓고 아웃이야. 찬스를 놓쳤어. 내가 속으로 ‘에라, 이놈들아’했다니까. 해태 때는 “야, 안타 못 칠 거 같으면 맞고라도 나가”하면 장채근처럼 덩치가 산만한 선수들도 “네, 알겠습니다”하면서 스트라이크 존 한가운데로 들어오는 공에도 맞고 나갔거든. 삼성 애들이 깡이 없어서 그랬어.
애초엔 두산을 다소 쉬운 상대로 보지 않으셨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한국시리즈 올라갔을 때 두산 보고 ‘제일 쉬운 팀이 하나 걸렸구나’했다고. 그런데 그게 아니었지. 삼성이 2승4패로 졌으니까. 사실 말이야. 정규 시즌 1위로 한국시리즈 올라간 다음에 선수들이 전부 ‘여기 아프다, 저기 아프다’했다고. 이상하게 피칭들을 하지 않더라고. 그리고 바로 한국시리즈에 들어갔으니 제 실력이 나왔겠느냐고. 그래도 김인식 감독이 그해 우승해서 오랫동안 두산 감독을 맡은 거 아니야(웃음). 내가 진짜 감독들 목 많이 쳤다. 다른 감독들한테 몹쓸 짓을 많이 해서 지금 제주도로 귀향 온 거 아니야(웃음).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만난 삼성 김응룡 감독(사진 왼쪽부터)과 LG 김성근 감독(사진=삼성) |
2001년은 감독님이 한국시리즈에서 유일하게 우승하지 못한 해였습니다. 하지만, 이듬해 다시 기회가 찾아옵니다. 파트너는 역시 서울팀인 LG였습니다.
LG랑 할 때도 불안 불안했잖아.
전해 두산과의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지만, 2002년 LG와의 한국시리즈에선 6차전에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드라마를 쓰며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6차전에서 이승엽이 동점 홈런치고, 마해영이 역전 끝내기 홈런쳤잖아. 한국시리즈 끝나고 나서 현명관 구단주가 저녁을 먹는데 갑자기 그러는 거야.
수고했다고요?
아니, “제가 감독님 욕을 참 많이 했습니다”하는 거야.
왜요?
“한국시리즈 때 이승엽이 그렇게 못 치는데 계속 기용할 수 있느냐”고 말이지. 그러더니 “6차전 때 이승엽이 홈런 치는 걸 보고 역시 감독님은 다르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떻게 홈런 칠 걸 아셨습니까”하더라고. 그래 내가 뭐랬는지 알아?
글쎄요.
“저도 구단주님 마음과 똑같았어요. 저도 이승엽을 교체하고 싶었는데 마땅히 낼 선수가 없어서 계속 출전시킨 겁니다. 그런데 그냥 내버려두니까 하나 칩디다?”(웃음). (이)승엽이 보면 꼭 중요할 때 한방씩 치잖아.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도 그렇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도 그렇고.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승엽이는 참 큰 경기에 강해.
비록 한국시리즈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패장 김성근 LG 감독은 감독님으로부터 “야구의 신(야신)”이라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녹차 잔을 빙빙 돌리며) 패장을 좀 올려줄 말이 없나 생각을 했었다고. 상대도 올려주고 나도 올릴 방법이 뭐 없나 생각하다가 ‘아, 신이라고 불러주자’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내가 그 말하고 주변에서 그러대. “김응룡이 저가 보통 놈이 아니다. 야신한테 이겼으면 자기는 뭐냐”고 말이지(웃음). (한참 웃다가) 그럼 뭘 해. 야신도 짤리더만.
2002년 삼성은 드디어 한국시리즈에서 첫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구단 창단 사상 21년 만의 쾌거였는데요. 삼성 우승 배경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부상 선수가 적었던 게 큰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전만 해도 삼성은 유독 부상선수가 많은 팀이었는데요. 어째서 2002년엔 부상 선수가 많지 않았던 걸까요.
2001년 삼성에 가니까 프랭크 조브 박사라고 미국 의사한테 진료를 받겠다고 예약한 선수가 15명이나 되더라고. 매니저한테 “조브가 뭐 하는 사람이야?” 물었더니 “세계에서 수술 제일 잘하는 의사”라고 하더라고. 그래 내가 그랬지. “야, 야구선수 중에서 어깨, 팔꿈치, 허리 안 아픈 놈이 어딨냐”.
조브 박사면 그래도 팔꿈치 인대접합수술을 창안하고, 미국에서도 꽤 존경받는 의사인데요. 그런 의사한테 진료받으면 선수들도 심리적으로 꽤 안정되지 않을까요.
감독생활하면서 의사랍시고 의술을 장사로 생각하는 외국인 의사들을 자주 봤어. 수술은 어디까지나 최후선택이지, 최선책이 아니라고. 선수들도 그래. 부상을 억지로 참을 필요는 없지만, 조금 아프다고 퍼지면 문제가 있는 거야. 메이저리그나 일본 프로야구도 보라고. 조금 아프면 재활로 참고 버티잖아. 해태 때는 선수들이 다 그렇게 참고 견뎌도 다른 팀 선수들 못지않게 현역생활을 오래했어.
감독님 때문에 해태 주치의이자 훌륭한 의사였던 임채준(현 서남의대 교수) 박사님이 ‘돌팔이’란 소릴 듣지 않았습니까.
그랬지(웃음). 선수들이 병원에 가면 ‘최소 3개월은 쉬어야 한다’는 진단을 받고 오거든. 그런데 내가 볼 땐 그 정도는 아니야. 그럼 선수들이 임 박사한테도 진단을 받으러 갈 때 내가 사전에 연락하지. “임 박사, 난 그놈이 다치는 걸 현장에서 똑똑히 봤어. 걔 3일짜리야!”하면 임 박사도 선수가 찾아왔을 때 “넌 3일 쉬면 다 낫는다”고 그래(웃음).
선수들의 반발 혹은 꾀가 발동했을 듯싶은데요.
(두눈을 동그랗게 뜨며) 어떻게 알았어? 자꾸 그러니까 이놈들이 아예 다른 병원에서 진단서를 떼서 오는 거야. 그래 내가 그랬다고. “뭐? 진단서? 야, 이놈아! 난 구단 지정병원에서 뗀 진단서만 인정하는 거 모르냐”(웃음).
삼성 때도 해태 시절처럼 주치의 진단만 인정하셨습니까.
그랬지. 그래도 삼성에서 부상으로 문제가 된 선수는 없었잖아. 선수를 아끼는 건 좋은데, 삼성은 너무 아끼더라고. 내가 삼성 오면서 그런 것들이 바로 잡혔지. 그래서 경험이 중요한 거야.
2004년 현대와의 한국시리즈에서 패하고 나서 삼성 감독에서 물러나셨습니다. 만약 그해 우승했다면 ‘한국시리즈 11회 우승 감독’이라는 금자탑을 쌓을 수 있었는데요.
2001년 한국시리즈랑 비슷했어. 그때도 그렇게 비가 쏟아지더라고. 물론 2002년 삼성이 우승했지만, 2004년까지도 삼성은 해태와는 좀 달랐어. 정신력에서 좀 차이가 나더라고. 큰 경기에서 끈질기게 달라붙는 맛이 덜했어. 삼성이 진짜 강팀이 되려면 몇 년 걸리겠더라고. 다행히 동열이가 감독이 되면서 삼성이 2005년부터 2006년까지 2년 연속 우승했지. 내가 10년만 일찍 삼성에 왔었어도 선수들을 두들겨서 강철을 만들었을 텐데 말이야. 2001년은 뭐 이빨 빠진 호랑이였지(웃음).
김응룡 감독을 둘러싼 오해와 진실 야구인들은 "김응룡 감독은 냉혹한 승부수처럼 보이지만, 내면은 언제나 천진한 아이처럼 순수한 면이 많았다"고 말한다. 그는 누구보다 인생을 치열하게 그러나 즐겁게 산 이다(사진=스포츠춘추)
호텔 커피숍에서 시작한 김응룡 전 감독과의 인터뷰는 제주의 맛집을 순회하면 하루종일 진행됐다. 김 전 감독은 건강 때문에 막걸리 한 두잔을 마실 뿐이었다. 하지만, 야구 이야기를 할 땐 얼굴이 벌개지도록 추억담을 쏟아냈다. 그의 건강을 지키는 약은 다름아닌 야구의 추억이었다.
감독님은 본의 아니게 많은 어록을 남긴 야구인으로 유명합니다. 1998년 선동열에 이어 이종범이 일본 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건스에 진출하자 그 유명한 “동열이도 없고~종범이도 없고~”란 말을 하셨습니다. 많은 코미디언이 감독님의 그 말을 성대모사했는데요.
(멋쩍은 듯이 웃다가) 나도 많이 봤는데. 아니 누가 그런 말을 하고 다녔는지 몰라. 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거든. (이)종범이 일본 갔을 때 기자들이 “선동열도 없고, 이종범까지 가버려서 팀을 이끌기 어려우시겠습니다”해서 “내가 봐도 그렇다”라고 한 적은 있어도, 코미디언들이 하는 것처럼 ‘동열이도 없고~종범이도 없고~’라는 식의 말은 한 적이 없다고. 아, 그런데 어디 갈 때마다 꼭 그런 말을 따라 하더라고(웃음).
삼성 감독이실 때 “박한이는 정신병자다.” 이런 말씀도 하신 걸로 압니다. 지금도 회자하는 말인데요. 박한이는 “설마 감독님이 그런 말을 하셨습겠습니까. 설령 하셨어도 장난으로 하셨겠지요”라고 하더군요.
난 그냥 한 소린데, 그걸 기사로 쓸지 누가 알았겠어. (잠시 웃다가) 박한이는 견제도 잘 걸리고, 사인 미스도 많았다고. 그래 하도 화가 나서 그냥 웃자고 한 말이었거든. 에이, 그걸 그대로 쓰면 안 되는데 곧이곧대로 썼더라고(웃음). 그래도 박한이가 참 삼성에선 알토란 같은 역할을 많이 했어.
조동찬을 가리켜선 “무한 기용”을 거론하신 바도 있습니다.
내가 진짜 그놈 키우려고 자체 홍백전, 시범경기, 연습경기에 다 내보냈었어. 그런데 그놈은 끝까지 힘으로만 하려고 하더라고(웃음). 그래도 지난해 잘하니까 얼마나 좋아.
말이 나온 김에 과거 선수들과 얽힌 이야기를 물어보겠습니다. 지금껏 배출해낸 선수 가운데 가장 정이 가는 선수가 있다면 누굽니까.
(잠시 생각하다가) 에이, 그런 거 없어. 말했다간 또 벌떼같이 달려올지 몰라(웃음).
그렇다면 안타까운 선수는 있으셨습니까.
까치가 안타까웠지.
까치라면, 해태 왼손 투수였던 김정수(현 KIA 코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눈을 가늘게 뜨며) 참, 김정수는 아까운 선수였어. 암, 아깝고말고.
기구한 사연이 있을 듯합니다. 어떤 사연이 있으신지….
(눈을 크게 뜨며) 사연은 무슨, 그놈은 술만 좀 줄였으면 대성했을 거야. 동열이랑 불펜에서 공을 던지면, 정수 그놈 공 끝은 ‘팡팡’ 살아있었다고. 정말 공이 대단했어. 아, 그런데 백날 그러면 뭐하냐고. 아침에 캐치볼 하면 이게 술이 덜 깼는지 상대방 머리를 넘긴다고. 진짜 그놈은 소질이 있었는데.
그래도 1986년 해태가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을 꺾고 우승한 건 김정수의 공이 컸습니다. 그때 한국시리즈 MVP에 뽑히기도 했고요.
그건 운이지. 정규 시즌 10승을 한 번도 못했잖아. 그 실력이면 10승이 뭐야, 15승도 할 수 있었지. (뭔가 생각난 듯) 안타까운 선수하면 김대현이도 생각나.
2002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김응룡 감독이 트로피를 들고 기뻐하고 있다(사진=삼성) |
1988년 교통사고로 숨진 고 김대현 투수 말인가요?
(고개를 끄덕이며) 원광대 졸업하고 1986년인가 입단했다고. 다음 해에 걔가 9승(주 : 9승5패 평균자책 2.78)인가 따냈어. 동열이 쫓아다니면서 슬라이더도 배우고, 참 재미있게 야구를 했어. 나도 걔 크는 걸 보는 게 재밌었다고. 하루하루 잘 커갔는데 이런 세상에, 교통사고를 당했지 뭐야. (김)대현이는 지금 생각해도 참 아쉬워. 살아있었으면 참 좋은 투수가 됐을 텐데 말이야.
감독 시절 선수만큼이나 많은 코치와 함께 동고동락하셨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코치가 있다면 누구십니까.
백기성이지. 1983년 내가 해태 감독하면서 군산상고 감독하던 걸 데려왔잖아. 내가 한일은행 감독일 때 백기성이 선수였다고. 그런데 말이야. 내가 한마디 하면 꼭 며칠간씩 사라져서 안 와.
어떻게 말씀하셨기에 코치가 잠수를 타나요.
뭐 있어. 못할 땐 그냥 “이눔의 자식, 정신 차려. 똑바로 해”그랬지. 그런데 그런 식으로 몇 마디 하면 이게 삐쳐서 안 나와(웃음). 그래도 참, 백 코치 고생 많이 했어. 덕분에 해태 방망이가 많이 좋아졌지. 이야기하다 보니까 송유석도 많이 생각나네.
‘마당쇠’ 송유석이요?
그놈 정말 고생 많이 했어. 사실 송유석은 배팅볼 투수로 입단했다고. 광주 진흥고 감독이 나한테 “정말 배팅볼 잘 던지는 애가 있으니까 쓰십시오”해서 썼는데, 몇 년 동안 배팅볼만 던졌다고. 그러다 1군 투수를 꿰찼는데, 정말 걔 고생 많이 했어. 나중에 잘 되니까 내가 다 기분이 좋더라고.
송유석이 무명의 어둠을 뚫고 대성했다면 1991년 해태에 1차 지명으로 입단한 한양대 출신의 오희주는 그 반대였습니다. 해태 팬들은 두고두고 “왜 인하대 출신의 거포 김기태를 1차 지명하지 않았느냐”고 아쉬움을 털어놨습니다.
스카우트팀에서 김기태, 오희주 중에서 고민했다고. 그러다 투수가 없으니까 오희주를 뽑은 거야. 그때 스카우트 팀장이 젊은 선수를 감독실로 데려왔는데, 이거 패션이 좀 그래.
패션이 어땠기에….
반짝이 옷에다 머리는 파마해서 뽀글뽀글한 거야. 난 스카우트 팀장이 가수를 소개해주나 싶었어. 그래 내가 “유명한 가수신가?”했다고. 그러니까 팀장이 “이번에 1차 지명한 투수 오희주”래. 속으로 ‘이야, 해태에 적응하기 어렵겠다’싶었지. 아니나다를까 2년 있다가 LG로 갔어(웃음).
한국 스포츠 사상 최초의 감독 출신 구단 사장 2004시즌을 끝으로 감독에서 물러난 김응룡 감독(사진 왼쪽부터)이 신임 선동열 감독과 신필렬 사장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사진=삼성)
2004년 11월 삼성은 김응룡 감독을 제10대 구단 사장으로 임명하는 한편 선동열 수석 코치를 감독으로 승격시켰다. 감독이 구단 사장으로 임명된 건 국내 스포츠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삼성은 한국 프로야구 및 구단 발전에 크게 공헌한 점을 높이 사 퇴진의사를 밝힌 김응룡 감독을 사장으로 임명하게 됐다고 밝혔다.
김 전 감독은 “22년간 프로야구에서 많은 것을 경험했고 성과도 거뒀다. 이젠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고 싶다”라며 “선동열 신임 감독이 삼성을 잘 이끌어줄 것”이라며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주변에선 선수에서 감독, 감독에서 사장까지 오른 김 전 감독을 부러움 반, 시샘 반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그가 사장직을 원하지 않았다는 걸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한국 프로스포츠 사상 처음으로 감독이 구단 사장으로 등극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상은 하셨나요?
그게 잘못이었어.
네?
(나지막한 목소리로) 감독은 감독에서 끝나야지 사장 같은 거 하면 안 돼.
그럼 감독을 그만두고 은퇴하려고 하셨던 건가요.
(고개를 끄덕이며) 그랬지. “난 이제 도저히 못 하겠다. 선동열 수석을 감독시켜라”라고 했지. 그런데 사흘 후엔가 구단에서 나보고 사장을 하라고 하더라고. 앗따, 막막하더라고. 야구만 하던 놈이 사장할 수 있을까 싶더라고. 그래도 김재하(현 대구 FC 사장) 전 단장, 그 친구가 참 고마워. 날 위해 참 열심히 뛰어줬어.
김재하 전 단장과 궁합이 잘 맞으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어딜 가든 야구단은 단장 중심으로 프런트가 돌아가야지 사장 중심으로 돌아가면 안 돼. 사장은 그냥 방패막이만 돼주면 된다고. 그러려면 사장보다 단장을 잘 뽑아야 해. 김 전 단장은 그런 면에서 훌륭한 단장이었어.
사장으로 계실 때 야구장에서 자주 뵙는데요. 야구만 보시고, 선수단 근처도 가지 않으시던데요.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셨습니까.
이유는 무슨, 원래 그래야 하는 거야. 사장이 감독, 선수 주변을 어슬렁거리면 자신감 있게 플레이를 못해. 윗사람 의식을 하게 된다고. 삼성 사장으로 있을 때 야구만 보고 선동열 감독한텐 한마디도 안했어. 그냥 어떻게 하면 감독에 힘을 실어줄까만 고민했지. 예전에 말이지 박건배 회장이 그랬거든.
박 회장이 어떻게 하셨다는 말씀입니까.
선수들 많은 데서 꼭 나보고 “감독님, 올 시즌 잘 부탁합니다”하면서 극진히 대우해줬어. “제가 감독님을 소홀히 대하면 선수들과 프런트가 감독님을 무시할 수 있습니다”하는 게 이유였다고.
사장 재임 시 한국야구위원회(KBO) 이사회에 나가시면 ‘선수들 연봉을 올려줘야 한다’고 주장하신 걸로 압니다.
글쎄, 내가 그런 말을 했나. 사실 무턱대고 연봉만 많이 줄 순 없잖아. 물론 선수들이 많이 받으면 좋지. 어린이들 꿈이 뭐야? 선수 중에서 부자가 나와야 어린이들이 ‘지금은 가난하지만,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부모 형제들 다 잘 살게 해주겠다’는 목표가 생길 거 아니야. 그게 꿈이란 말이지. 그런 의미에서 야구선수들도 연봉을 많이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적은 있어.
사장 재임 기간 중 가장 힘든 게 있었다면 무엇이었을까요.
회의지 뭐. 특히나 KBO 이사회는 아, 진짜 힘들었어(웃음). 감독자회의는 감독끼리 할말만 하고 헤어지거든. 아, 그런데 이사회는 한번 시작했다면 하면 길어, 길어, 정말 길어. 5분이면 끝날 이야기를 한 시간 넘게 한다고. 그럼 난 밖에 나가서 커피 마시다가 다 끝날 즈음에 들어간다고. 그래도 이상이 없어. 왜냐? 처음 회의 시작 5분 했을 때랑 1시간 뒤 끝났을 때랑 결론이 매번 똑같거든(웃음).
선수, 감독, 사장까지 모든 역할을 다 맡아보셨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애착이 가는 역할이 있다면 무엇이었습니까.
난 지금도 그래. 선수는 선수로 끝나야 해. 난 현역시절 돈을 못 벌어서 감독했다고. 프로 선수로 돈 많이 벌었으면 미쳤다고 감독했겠어? 일본이야 얼굴마담으로 야구 잘했던 놈을 감독으로 앉힌대도, 미국에서 돈 많이 번 스타플레이어가 감독하는 거 봤어? 나도 그래. 선수로 돈 좀 벌고 했으면 감독까진 안 했을 거야. 이게 솔직한 심경이라고.
“그리운 가족을 만나고 싶다.” 김 전 감독은 제주에서 차분하게 여생을 보내고 있다. 직접 차를 운전하는 등 그는 프로야구 최고의 명장에서 평범한 촌로(村老)로 만족하며 살고 있다(사진=스포츠춘추 홍진혁 기자)
김응룡 전 감독은 북에 두고 온 가족 이야기만 하면 침착하지만, 한이 서린 표정을 지었다. 야구인으로 모든 걸 이뤘지만, 북에 두고 온 어머니와 여동생들의 생사를 모르는 자신을 두고두고 원망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는 언젠가 만날 가족과의 해후를 포기하지 않은 듯했다.
올해로 호적상 70살이십니다. 언제 한번은 고향(평안남도 평원)땅을 밟으셔야 하는데요.
북한엔 한 번 다녀온 적이 있어.
북한에서 1·4 후퇴 때 헤어진 어머니, 여동생들은 만나셨습니까.
(기운 없는 목소리로) 아무도 못 만났어.
생사확인은 하셨습니까.
(긴 한숨을 내쉬며) 쉽지 않더라고. 사기만 여러 번 당했지. 여기저기서 사진 들고와서 “당신 가족”이라고 하라고 했는데, 다 사기였어.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감독님 정도의 지명도라면 북한에서도 체재 선전 차원에서 가족 상봉을 적극적으로 주선하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아버지 살아계실 때 나도 몇 번 (이산가족 상봉) 신청했지. 그런데 회신이 한 번도 없어. 아마 이유가 있을 거야. 내가 이북에서 말하는 걸로 치면 반동분자야. 일본강점기 때 우리 집안이 지주였다고. 거기다 내가 월남 가족이고. 그래서 가족 상봉이 잘 안 되는 것 같아.
가족사진 보시면서 회한의 눈물만 삼키셨겠습니다.
(다시 한숨을 쉬며) 가족사진 있는 사람은 그래도 행운이야. 난 가족사진도 못 갖고 내려왔어. 그게 한(恨)이지, 한. (혼잣말로) 아버지 살아계셨을 때 만났을 때 얼마나 좋았겠노.
아버지가 감독님 야구하는 걸 그렇게 반대하셨다면서요.
반대했지. 야구장에 한 번도 안 오셨어. 옛날 김일배 씨라고 국가대표 감독하던 양반이 나보고 “너도 백인천처럼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해 봐라”하셨어. 하지만, 난 뒷바라지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 그래 포기했지. 아마 일본에 갔으면 내가 덩치도 (백)인천이보다 크고 했으니까 성공했을지도 모르지.
아버지가 그토록 야구하는 걸 반대하신 이유라도 있나요.
옛날엔 스포츠를 깡패들이나 하는 건줄 알았지. 그래서 반대하신 거지. 참, 아버지가 나와 체구가 비슷했다고. 부산상고 졸업하고 아버지 양복이랑 구두 빌려 입고 시내에 다녔다고(웃음).
아버지는 언제 돌아가셨습니까.
1998년 6월 정도 됐을 거야. 경기를 하는데 허리띠가 ‘뚝’ 끊어져. 속으로 ‘아, 이상하다’싶었지. 경기 끝나고 구단 사장이 찾아와서 우물쭈물하는 거야. “왜 그러느냐”고 물었지. 아, 그러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거야.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소식을 알리지 말라고 했다는 거야. “아, 그래요”했지. 아프신 걸 알았거든. (창문 밖의 서귀포 바다를 바라보며) 아버지, 어머니 두 분 다 내가 해태에서 감독할 때 돌아가셨다고. 친어머니는 아니지만, 어머니는 1989년 빙그레와 한국시리즈 할 때 돌아가셨어. 그때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는데…(한숨을 내쉬며) 후유- 마지막 선물을 주고 가신 게 아닌가 싶어.
“뭐, 불? 울긴 왜 울어? 불난 집이 재수 좋다는 거 몰라?” 해태는 이제 야구연감 속으로 사라진 전설의 팀이 됐다. 모든 전설이 그러하듯 해태는 많은 야구팬의 가슴 속에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사진=스포츠춘추)
1986년 한국시리즈는 영·호남이 자랑하는 삼성과 해태의 일전이었다. 전해 통합우승으로 한국시리즈를 생략했던 삼성은 이해에도 전기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일찌감치 한국시리즈를 준비했다. 해태는 전·후기리그 2위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1983년 우승을 재현하려 준비했다.
삼성과 해태는 김시진과 선동열 등 팀의 에이스를 총출동시켜 광주 1차전을 맞는다. 한국시리즈 첫 등판의 선동열은 6회까지 삼성 타선을 1안타로 잘 막았다. 그러나 7회 초 김성래에게 2점 홈런을 맞으며 휘청였다. 양일환, 성준, 진동한으로 이어진 삼성 투수진은 7회 말까지 해태 타선을 무실점으로 막았다.
삼성 김영덕 감독은 8회 말 에이스 김시진을 투입해 1차전을 매조지하려 했다. 그러나 그것이 화근이었다. 김시진은 등판하자마자 1점을 줬고, 9회 초 팀 타선이 1점을 추가해 3대 1를 만들었으나, 9회 말 2실점하는 바람에 3대 3 동점을 허용했다. 결국, 해태는 연장 11회 말 1사 1·2루에서 김성한이 김시진의 초구를 통타, 끝내기 안타를 기록하며 4시간8분의 혈전을 마무리지었다.
경기가 끝나고서 김영덕 감독은 김시진 투입의 실패를 두고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지자 “7회 말 수비를 마치고 더그아웃으로 돌아오던 진동한이 관중이 던진 빈병에 머리를 맞아 교체가 불가피했다”고 해명했다. 진동한은 수건으로 머리를 싸맨 채 더그아웃에 들어왔지만, 다시 등판하지 못할 정도의 부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때 누가 알았으랴. 이 발언이 대구에서 어떤 사건의 불씨가 됐는지를.
앞서 감독님께 ‘감독론’에 대해 물었었는데요. 후대 감독들에게 더 하실 말씀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뭐, 다들 잘하는데.
감독이실 땐 미팅도 거의 하지 않으신 걸로 압니다.
미팅? (손을 좌우로 흔들며) 그런 거 난 생전 해본 적이 없어. 다 담당 파트 코치들이 있잖아. 타격, 투수, 수비, 작전 코치들하고 이야기하지, 선수들과는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안 했어. 생각해보라고. 다 전문분야 코치들이 있는데, 감독이 ‘이래라, 저래라’ 할 필요가 뭐 있겠어. 이건 꼭 알아두라고.
그게 뭡니까.
결국, 야구는 감독이 아니라 선수가 하는 거야. 난 22년 감독하면서 그걸 잊은 적이 한 번도 없어.
22년 감독 생활하시면서 수많은 일화가 있을 듯합니다.
뭐가 있겠노. (한참 생각하다가 빙그레 웃으며) 1986년 OB(두산의 전신)가 한대화를 해태에 주고서 굉장히 애를 먹었다고. 팬들한테 욕도 많이 먹고. 그해 시즌이 끝나고 해태가 김용남을 트레이드하게 됐다고. 당시 OB 모 사장이 “우리가 한대화 때문에 이 고생을 했으니 김용남은 꼭 OB로 보내주소”하는 거야. “알았다”고 했지.
하지만, 김용남은 빙그레(한화의 전신)로 임정면과 함께 현금 트레이드됐습니다.
내 이야기 계속 들어보라고. 나는 빙그레로 보내고 싶은데, 구단 방침은 ‘기왕 트레이드할 거면 최하위 팀에 주라’는 거였어. 그래 OB 모 사장한테 “미안합니다. 어디 내가 힘이 있습니까”했지. 아, 그랬더니 그 사장이 “내가 이 일은 관속에 들어가서도 잊지 않겠다”면서 막 화를 내는 거야. 아, 무섭더라고(웃음).
1986년 한국시리즈 해태-삼성전이 끝난 후, 일부 대구팬의 방화로 해태 버스가 불에 탄 채 세워져 있다(사진=KBO) |
감독 생활 중 최대 위기는 언제였습니까.
1986년 대구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삼성과의 3차전이었지. 0대 3으로 지고 있다가 4대 3으로 역전해 이겼다고. 시리즈 전적 2승1패로 숨통이 트이나 싶었지. 아, 그런데 웬걸. 구장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매니저가 울면서 뛰어오더니 “감독님, 불이 났습니다. 불이!”하는 거야. 밖에 나갔더니 구단 버스가 불타고 있더라고. (한숨을 내쉬며) 그땐 뭐 시대가 그랬으니까.
불타는 버스를 바라보면서 심경이 복잡하셨겠습니다.
이미 엎질러진 물 아니야. 수습을 해야지. 매니저가 옆에서 계속 울고불고 하기에 내가 그랬다고. “야, 이놈아. 웃어라. 웃어. 불난 집이 재수 좋은 거 몰라.”(웃음).
당시 삼성이 해태에 피해보상 차원에서 2천500만 원을 줬습니다.
거기에 재미난 사연이 있다고. 버스 안에 있던 선수들 유니폼이며, 빠따며 다 배상을 해줘야 할 거 아니야.
그렇죠.
피해물품을 적는데 (고개를 갸웃하며) 아무래도 이상한 거야.
무엇이 이상하셨습니까.
아니, 김봉연이 말이지. 구단 버스에 양복을 뒀다는 거야. 그리고 방망이도 10자루를 버스에 두고 내렸다고 하더라고. 생각해 봐. 양복을 벗어놓으면 호텔에서 벗어놓고 와야지 왜 버스에 놔둬. 그리고 방망이는 자기가 쓸 것만 구장에 갖고 오지, 다 가져오겠느냐고(웃음). 어쨌거나 그것도 다 삼성에서 물어줬지.
예전 해태 팬북을 보면 후배들이 가장 존경하는 선배로 김봉연을 꼽았습니다. 시간이 지나 해태 출신 야구인들에게 물어보니 “가장 존경하면서도 한편으론 구두쇠 선배였다”며 웃더군요.
(김)봉연이에 대해서 잘 몰라서들 그래. 내가 한 번은 어느 커피숍에서 사람을 만나고 있었다고. 그런데 옆에 보니까 봉연이가 자기 누이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어. 듣고 싶지 않았는데, 자꾸 귀에 들려. 들어보니까 ‘아, 봉연이가 가족들을 참 많이 챙기는구나’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봉연이가 그랬어. 지가 힘들게 번 돈을 가족들을 위해 다 썼다고. 좋은 친구였지. (이)순철, (김)성한 다 그랬어. 해태 선수들이 가족애 하나는 정말 대단했어. 그러니 다른 구단 선수들처럼 돈을 ‘펑펑’ 쓸 수 있나. 아, 봉연이가 나 때문에 교수된 거 알지?
정말이요?
해태 있을 때 여기저기서 강연 청탁이 들어오는 거야. 난 그런 거 딱 질색이었거든. 그래 봉연이를 대신 보냈지. 그때 말문이 트였는지 나중에 교수까지 했잖아(웃음).
1997년 6월 29일 잠실 해태-LG전에선 보크 선언을 한 심판에게 다가가시다 관중이 던진 참외에 머릴 맞은 적이 있으십니다. 그때도 위기라면 위기가 아니었을까 싶은데요.
그랬지. 나가다가 제대로 맞은 적이 있지(웃음). 그래도 맞는 순간에 정신을 차려 보니까 앞에 참외가 있더라고. 속으로 ‘다행이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싶었어. 맥주병으로 맞았으면 골로 가는 거 아니야(웃음). 그게 사실 심판한테 던졌던 건데 내가 맞은 거거든. 참외 던진 양반의 제구가 좋지 않았던 거지(웃음). 참, 내가 오늘 에피스드 다 풀어놓네.
김응룡 감독 대신 강연회 연사로 나선 김봉연 전 해태 코치를 재밌게 표현한 허영만 화백의 그림 |
정식으로 ‘김응룡 회고록’을 써보시는 것도 좋으실 듯합니다. 감독님의 야구인생이야말로 한국 야구의 살아있는 역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게 말이야. 책 한 권 내려고 했는데, 오늘 당신한테 이야기 다하고 있어. 내가 옛날 어느 스포츠신문에 연재를 한 적이 있거든. 한일은행 감독할 때였는데, 써보니까 안 되겠더라고. 다 자기 자랑밖엔 안 돼. (문득 생각난 듯) 혹시 김동엽 씨가 썼던 ‘그래 잘라라, 잘라.’라는 책 알아?
네, 읽은 적이 있습니다.
김동엽 씨가 그 책을 내서 읽어봤는데, 전부 자기 자랑이야(웃음). 그런데 광주야구계의 대부로 통하던 김종태란 양반이 있었거든. 김동엽 씨와 고교 동창인데, 하루는 김동엽 씨한테 그런 거야. “야, 책 냈다면서 왜 나한테는 안 보내주느냐”고 말이지. (한참 웃다가) 아, 그런데 김동엽 씨가 보내줄 수가 없었어.
왜요?
책에다 ‘지금 광주에 사는 김종태가 내 소싯적 친구였는데, 고교 시절 내 책가방 들어줬던 사람이다’라고 쓴 거야(웃음). 그걸 김종태 씨가 봤어봐. “이눔의 자식”그러지 않겠어(웃음). 그래서 자기 이름으로 내는 회고록은 힘든 거야.
“다시 태어나면 감독이 아니라 프로야구 선수가 되고 싶다.” 한국시리즈 우승 후, 카페레이드를 펼친 해태 선수단(사진=스포츠춘추)
1996년 2월, 해태는 하와이에 스프링캠프를 차렸다. 이때 코칭스태프와 노장 선수들 간에 마찰이 있었다. 선수들은 이순철을 중심으로 뭉쳤고, ‘더는 훈련을 하지 못하겠다’는 강경한 분위기가 선수단 전체에 흘렀다.
김응룡 감독은 사태 수습차원에서 조기 귀국을 선택했다. 많은 야구전문가는 “해태의 팀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다”며 그해 해태를 우승 후보에서 제외했다. 그러나 해태는 해태였다. 모든 이의 예상을 뒤엎고 해태는 그해 현대를 꺾고 한국시리즈 8회 우승을 이뤘다.
하지만, 앙금은 지문과도 같은 것이었다. 지워지래야 지우기가 어려웠다. 그해 시즌이 끝나고 주요 선수들이 팀을 떠나기 시작했다. 1997시즌 후반기, 이순철은 경기 중반 대수비로 기용됐다. 그런데 이순철의 타석이 됐을 때 갑자기 김 감독은 대타를 기용했다. 베테랑 이순철에게 그 같은 대타 기용은 굴욕이나 다름없었다. 이순철은 당장 짐을 꾸려 구장을 떠났다. 그것으로 김 감독과 이순철의 인연은 끝난 듯 보였다. 한국시리즈 출전명단에서도 이름이 빠진 이순철은 그해 시즌을 끝으로 삼성으로 이적했고, 1999년 삼성 코치가 됐다.
하지만, 두 이의 묘한 관계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2000시즌이 끝나고 김 감독이 삼성 사령탑으로 부임하며 이순철은 김 감독과의 불편한 관계를 의식해 LG로 둥지를 옮겼다.
그 옛날, 한일은행 시절 감독 선임문제로 강대중 감독과 마찰을 빚었던 선수 김응룡은 평생 강 감독이 숨을 거둘 때까지 관계를 회복하지 못했다. 강 감독은 “김응룡이 오해했다”며 괴로워했고, 김응룡은 강 감독의 해명을 듣지 못한 채 스승을 떠나보내야 했다. 평생 한으로 남을 만한 일이었다. 이순철과 김응룡의 관계도 그리될 뻔했다. 그러나 김응룡은 운이 좋았다.
이순철이 과거의 기억을 뒤로 한 채, 김응룡도 과거의 미안함을 간직한 채 화해의 손을 맞잡은 것이었다. 이순철은 김응룡이 삼성 사장에서 물러났을 때 가장 먼저 전화를 걸어 위로의 말을 전하고, 제주로 내려가 스승 김응룡과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지금도 김응룡의 건강을 가장 걱정하는 이가 바로 이순철이다.
인생은 야구처럼 직선이 아니다. 돌고 돌아 언젠가 다시 홈에서 만나는 그런 윤회의 운명인 것이다. 현재 김응룡은 제주에서 야구장 건설을 위해 바삐 움직이고 있다. 그것이 야구인으로서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대상포진에 걸려 고생한 것도 제주 야구장 건설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은 결과였다.
아, 제가 여쭤보지 못한 게 있습니다.
뭔데?
‘코끼리’란 별명은 어떻게 생긴 건가요.
내가 실업야구에 처음 들어가서 1루를 봤거든. 그때 내 딴엔 장난을 친다고 포구할 때 팔을 코끼리 코처럼 구부려서 잡았다고. 하루는 손희준 씨라고 독립투사 손병희 씨의 손자인 야구인이 날 보더니 “넌 꼭 동물원의 코끼리가 코로 비스킷을 받아먹듯이 공을 잡는다”고 하더라고. 그때부터 내 별명이 코끼리가 된 거야.
다른 별명도 많으셨다면서요.
내 덩치가 크다 보니까 덩치 큰 동물이름은 죄다 내 별명이었어. 어떤 분은 나보고 ‘곰배’라고 했고, ‘하마’니 뭐니 많이 불렸지.
그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드는 별명이 있으시다면 뭘까요.
모르겠어. 뭐, 그래도 코끼리가 제일 낫지 않겠어?
올해로 프로야구가 30주년을 맞았습니다. 감독님께선 한국 프로야구에 코끼리의 발자국처럼 거대한 족적을 남기셨습니다. 어떤 야구인으로 기억되고 싶으십니까.
기억이라, 그게 무슨 소용이겠어. 내가 제일 한이 되는 게 있다면 프로야구 선수가 못 된 거야. 현역 때 일본이 제일 부러웠다고. 언제 우리는 일본처럼 프로야구가 생기나 그랬거든. 또 한이 있다면.
네.
선수들한테 기회를 많이 주지 못한 것 같아. (한숨을 내쉬며) 내가 노장 급은 잘 안 썼다고. 될 수 있는 대로 젊은 선수들을 썼지. 이유는 있었어. 팀을 활성화하고 강하게 유지하려면 젊은 선수들을 써야 했거든. 그래서 노장 선수들은 죄다 날 싫어했을 거야.
일전 이순철 MBC SPORTS+해설위원을 만났더니 “막상 내가 감독이 되니까 김응룡 감독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더라”고 하시더군요. 이 위원 역시 현역 시절엔 감독님과 불편한 관계로 현역에서 은퇴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제가 알고 있기로도 감독님이 삼성 사장에서 물러났을 때 가장 먼저 전화로 안부 인사를 드리고, 지금도 꼼꼼히 감독님을 챙기는 분이 이 위원으로 알고 있습니다.
부모가 돼야 부모 마음을 안다고 하지 않아. 순철이도 그런 마음이겠지 (다시 창밖을 쳐다보며) 내 밑에 있던 놈들은 불행했어. 개인기록을 거의 챙겨주지 않았으니까. “개인기록은 너희가 알아서 하는 거다”라고만 했지. 지금도 마음이 찡할 때가 있어. 1승 한번 거둬보겠다고 아등바등하는 투수가 있는데, 내가 봤을 땐 한계에 왔거든. 그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꿨지. 요즘은 그렇게 하라고 해도 못할 거야. 하지만, 그때는 개인보다 팀이 우선이었어.
제주에서 김 전 감독은 영락없는 '자연인'이다. '비파'를 들고 있는 김 전 감독(사진=스포츠춘추 홍진혁 기자) |
어느 야구팬이 묻더군요. 우리도 미국이나 일본처럼 경험 많은 노장 감독이 대표팀을 맡는 걸 봤으면 좋겠다고요. 그런 의미에서 묻겠습니다. 혹여 2013년 제3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감독 제의가 오면 수락하시겠습니까.
(일언지하에) 못해. 몇 년 전에도 그런 이야기가 있었는데. 우리가 WBC에서 일본에 이긴 이유가 뭔지 알아? 일본 대표팀 감독은 은퇴한 사람이 맡았지만, 우리는 현역 감독이 대표팀 사령탑을 맡아서 그래. 아무래도 현역 감독의 머리 회전이 빠르거든. 다음 대표팀 감독도 현역 감독이 해야 실수가 없어.
감독님의 마지막 꿈이 궁금합니다.
꿈? 글쎄, 아직도 꿈을 못 꾼 것 같은데(웃음). 야구계를 위해서 할 일이 있으면 헌신을 해야지.
어떤 방법으로 헌신하실 생각이십니까.
감독 빼곤 다 할 수 있어(웃음).
다시 태어나셔도 야구를 하실 겁니까.
암, 해야지. 야구는 하되 감독은 안 할 거야.
알겠습니다. 감독님. 오늘 장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신 감독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박 기자가 올해 몇 살이지?
39살입니다.
그래? 난 말이야. 어떻게 70년이 흘렀는지 모르겠어. 어떤 면에선 난 행운아였어. 한 번도 안 잘리고 계속 조직생활을 했으니 말이야.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만큼 용기가 없었던 거야. 용기가 없었으니까 한 팀에만 ‘쭉’ 있던 거지. (회한이 섞인 듯한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인생은 다 바람 같은 거야, 바람. (옆에 있는 지인 오철웅 씨를 바라보며) 내일은 복숭아나 따러 갈까?(웃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