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의 성찰/명사의 죽음

[스크랩] `빈농의 8대종손` 이용섭 의원, "점쟁이 예언이 희망 키웠다"

아진(서울) 2011. 9. 16. 09:30
'빈농의 8대종손' 이용섭 의원, "점쟁이 예언이 희망 키웠다"
[스포츠서울닷컴] 2009년 11월 05일(목) 오전 10:32   가 | 이메일| 프린트

[스포츠서울닷컴ㅣ장 민 배병철기자] "어릴 때는 거의 농사꾼이었어요. 학교 수업이 끝나면 논에 가는게 일이었어요. 그리고 소 데리고 풀 뜯으러 가고, 땔감 구하러 돌아다녔죠. 그때 그 시절에는 다들 찢어지게 가난해서 그렇게 살았으니까요."

이용섭 의원은 어릴 적 자신을 '학생 농사꾼'이라고 표현했다. 학교에서 공부를 마치면 곧장 논으로 가서 농삿일을 했기 때문이다. 헐벗고 굶주리던 그 시절에는 이 의원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열심히 농사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이 의원은 '공부'와 '희망'을 놓지 않았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자신도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결과 대학교 4학년 때 행시에 합격했고 이후 관세청장국세청장을 거쳐 행자부 장관과 건교부 장관까지 역임하는 등 '학생 농사꾼의 신화'를 써내려갔다.


'8대 종손' 이용섭…"귀인 대접 받으며 자랐다"

앙증맞은 손을 꼭 붙잡고 목도리를 하고 있는 모습이 꽤나 귀엽다. 이 사진을 보던 이 의원은 "동생들과 함께 장난치고 뛰어놀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묻어 있는 사진"이라며 "요즘에는 그 시절이 그리울 때가 많다"고 말했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1년 뒤, 이 의원은 3남3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이 의원은 태어날 당시부터 문중에서 '귀인' 대접을 받았다. 8대 종손일 만큼 손이 귀한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특히 아버지는 이 의원에 대한 애정이 유달리 컸다. 아버지는 "벼늘이 수 백석이라도 위의 주절이 하나가 가장 중요하다"며 이 의원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었다.

'학생 농사꾼'시절…"학교 왕복 12km 걸어다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이 의원은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농사를 직접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학교 수업이 끝나면 곧장 논밭으로 나가 일을 해야했다. 농삿일을 하면서 안 해본 일이 거의 없다. 비료가 귀했던 시절이라 함평 읍내 공중 화장실에서 인분을 퍼나르던 기억도 있다. "왠만한 농사일은 중 3때 거의 다 체험해봤어요. 인분 비료, 농약 뿌리기, 두레질 등 안 해본게 없었으니까요. 그야말로 학생 농사꾼이었죠."

자연히 학교 공부에도 영향을 끼쳤다. 학교에서 모든 공부를 끝내야했다. 집으로 돌아오면 농사일과 전쟁을 치러야했기 때문이다. 물론 유일하게 공부할 시간이 있었다. 등·하교 시간이었다. 이 의원의 집에서 학교까지 거리는 왕복 12km. 시간으로 따지면 2시간이 훌쩍 넘는 거리였다. 이 의원은 매일 그 길을 오가며 영어 단어와 암기 과목을 외웠다. "고3까지 그렇게 생활했어요. 그때 걸어다닌게 하체가 튼튼해진 계기가 아닐까 싶네요."

꿈 안겨준 어머니…"점쟁이 예언이 희망 키웠다"

이 의원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는 공부에 대한 생각을, 어머니는 그 꿈을 실현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었다. 한학을 공부한 아버지는 남들보다 교육열이 뜨거웠다. 밥 먹기 조차 힘들었던 1960~70년대에 6남매를 모두 고등학교, 대학교에 진학시켰을 정도였다.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이 의원은 '큰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공부를 열심히 해야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어머니의 경우 그 사연이 재미있다. 당시 시골 마을에는 숙식이 필요했던 점쟁이들이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동네 사랑방에는 점괘를 묻기 위한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어머니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사랑방을 다녀오신 어머니는 매번 "점쟁이가 넌 엄청 큰 일을 한다고 하더라" "넌 보통 애들과는 다르다"고 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지만 수 십번씩 그런 얘기를 듣다보니 어느 새 '난 분명 큰 일을 하게 될거야'라는 인식이 싹 트기 시작했다.

대학 4년때 행시 합격…"예쁜 아내 만나기 위해"

이 의원은 대학교에 가서도 '학생 농사꾼'으로 살았다. 아버지가 혼자 일을 하다보니 방학 때면 늘 집에 가서 농사일을 도왔다. 그러나 '농사를 짓는게 능사가 아니다'고 생각한 이 의원은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행정고시 준비를 위해 암자에 들어갔다. 그리고 대학교 4학년 때 행시에 합격했다. 당시 전남대 상과대를 비롯해 재학생 중 합격자는 이 의원이 유일했다고 한다.

이 의원의 행시 도전기가 재미있다. 행시를 통과하면 예쁜 아내와 결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단다. 이 의원의 바람(?)대로 행시에 합격한 뒤 이곳 저곳에서 맞선 제의가 들어왔다고 한다. 그리고 마음씨 착하고 예쁜 아내와 결혼해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었다. 행시 합격을 계기로 이 의원의 인생 2막이 열리게 된 것이다.


'편견'과 싸운 공직자…"솔선수범, 그것이 해법"

국세청에서 처음 사회 생활을 시작한 이 의원은 3년 정도 일하다 재무부로 자리를 옮겼다. 그때부터 편견과의 싸움이 시작됐다. 학연, 혈연, 지연을 유난히 따졌던 그 시절에 이 의원은 어느 것 하나 내세울게 없었다. 지방대 졸업, 혈혈단신, 거기에 전라도 출신이라는 자신의 상황은 최악의 조건들이었다. 이 의원은 그 당시에 대해 "시골 농사꾼 생활 때보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더욱 힘들었던 시기"라며 "그래서 부가가치가 높은 일을 찾아서 해야했다"고 털어놓았다.

솔선수범하겠다는 마음 가짐 덕분에 이 의원은 보다 안정적인 자리를 갖추게 됐다. 험하고 고된 일을 도맡아하다보니 다양한 일을 할 기회가 많았다. 덩달아 '남들보다 성실하다'는 평가까지 받게 됐다. 이후 이 의원은 승승장구했다. 관세청장, 국세청장을 비롯해 행자부 장관, 건교부 장관 등 정부 요직들을 두루 경험했다.

[스포츠서울닷컴 정치팀 ptoday@media.sportsseoul.com ] 폴리피플들의 즐거운 정치뉴스 'P-TODAY'


출처 : 홍홍삼삼
글쓴이 : 홍삼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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